1972년 8월 26일,제20회 올림픽이 서독의 뭔헨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세계 인류의 대제전, 평화와 상호친선의 큰 잔치는 처음 열흘 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월 5일 TV 중계를 지켜보던 세계 각국의 국민들을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졌다.
검은 복면으로 몸을 감싼 무장 게릴라들이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둘을 사살하고 아홉 명을 인질삼아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들은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평화의 제전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증오와 투쟁의 장으로 돌변하였다.
게릴라들은 결국 모두 사살되고 말았지만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생생하게 전해진 이 참상은 팔레스타인문제를 더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인류 앞에 제기하는데 기여했다. 9월 8일, 이스라엘 공군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무차별 보복 폭격을 퍼부었다.
이 사건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수없이 교환된 테러와 보복공격을 가장 명료하고 극적으로 보여준 전형이었다. 오늘날 잊을 만하면 또다시 신문 외신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곤 하는 대소규모의 폭탄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은 본질적으로 이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이스라엘과 인접 아랍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무력충돌 역시 동일한 원인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야말로 중동의 화약고이며,그 화약고가 폭발할 때마다 기름으로 가득한 중동 일대에는 으례 화염이 치솟게 된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등의 아람국가들의 정치체제의 차이점과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문제를 중심으로 복잡한 중동문제를 알기 쉽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현실화한 시온주의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으니,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dor Herzl)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 끼리 따로 떨어져나와 독립된 순수 유태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같은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헤르즐의 출현은 시온주의운동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가져다주었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유태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년 가까이 포기하고 있던 옛 조국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은 유태인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게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다. 후일 1977년 11월,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수상 베긴이 행한 답변 연설은 이 같은 유태인의 열망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외국 사람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니,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이 땅(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예언자들이 성스러운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들려오며,이 성벽(예루살렘의 성벽) 속에서 울리고 있읍니다.
옛날 유태 나라 임금님들과 이스라엘 임금님들이 이곳을 통치하셨읍니다. ......이 땅에서 폭력에 의해 쫓겨나 있던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도 이 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시온에의 귀환, 이 권리와 특권은 발포어선언에 의해 우리들에게 승인된 것입니다.
그들은 인종차별의 철폐, 포함하는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시온주의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이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철학 사조에 물든 탓이었다. 제국주의 유럽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처럼 여기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막 갈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미 두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예전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중 유태인은 2만 5천이었으며 민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에 열을 올려,1914 년에는 총인구 74만 중 유태인이 8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아랍인들은 경계심을 품고서 터키 의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의 부패한 관료들은 단지 형식적인 이주 제한조치만을 취하면서 제몫을 챙겼을 뿐이다. 이같은 시점에서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상황을 가져온 것은 터키가 독일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것이었다.
영국은 1915년 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에게 넘겨주겠다는 소위 ‘맥마혼 서한’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메카의 수호자’ 후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아랍민족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T. E. 로렌스가 이끈 베두인(사막 유목민) 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궤멸시키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했다.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내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의 적극적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 던져진 불씨는 불꽃으로 타 오르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한번 아랍민족을 배신했다. 통일 아랍국가를 세우려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열망과는 달리,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통치하고,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탁통치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해버린 것이다 . 이후 연합국은 붕괴한 오스만제국의 아랍 영토를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점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리아와 파이잘을 공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했다. 영국은 발포어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는 반(反)시온주의 폭동이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비호 아래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가 있자 대규모로 밀려들어 1936년에는 총인구 1백 50만 가운데 28%인 43만에 이르렀다.
더우기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온 유태인들은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조합, 각종 산업시설과 금융기관,노동조합과 정당, 행정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대조직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영국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이같은 분쟁에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유태인의 수를 제한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태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1945년 3월, 이집트•사우디 아라비아•이라크•시리아•레바논•요르단 •예멘 등 아랍국가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 아랍연맹을 결성하고 아랍민족의 상호협력과 결속을 다짐했지만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은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 비밀군대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테러와 습격, 맹목적인 보복이 난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넌덜머리가 난 영국은 문제를 국제연합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군은 무책임하게도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보다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양측의 의도 때문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공격이 반복된 몇 달간 이미 팔레스타인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유태인 특공대가 한 아랍인 마을에서 2백 54명의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한 1948년 5월 9일의 사태는 전 아랍민족의 가슴에 증오의 불길을 쏟아부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군은 마침내 골치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는 아랍민족 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쇄도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유태 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 데다가 시온주의에 헌신적이었으며 무기 구입과 지원병 모집, 수송과 군사전술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반면 아랍 해방군은 군사 경험이 부족하며, 장교들이 나태하고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합동작전을 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사실화 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일단 만족했다. 그러나 아랍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외래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영토 위에 수많은 동포를 쫓아내고 세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요르단에 46만, 이집트에 20만,레바논에 12만,시리아에 8만등 거의 1백아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일거에 집과 농토와 생업을 잃어버렸고,사랑하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길 없이 피난민의 신세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서방세계의 검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벤 구리온과 그의 정당 마파아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하고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귀환 대열이 쇄도하여 전쟁 직전에 65만의 유태인과 74만의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1956년에 이르러 1백 67만의 유태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인은 불과 2만 명만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버틸 뿐이었다.
이상은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 이스라엘 건국사,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침략사이다. 이것이 건국사인가 아니면 침략사인가를 둘러 싼 논쟁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되었으며 아랍의 처지를 옹호하는 일체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금기시되다시피 하였다.
이같은 사태는 한국이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기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적 조류는 점점 아 에 유리하게 기울어가고 있다. 우선 유태민족이 2천년 동안이나 극심한 인종적 박해에 피해를 당해온 불운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나찌 독일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학살은 그것을 방조하거나 적어도 방관한 유럽의 각 민족들에게 상당한 죄의식을 안겨줄 정도였다. 유태인들이 그같은 박해를 받아야 할 그 어떤 행위도 한 일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민족이 모든 박해에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 역시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다른,모든 민족의 민족주의가 정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태 민족주의 역시 절대적으로 존중받아 마땅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웠다. 과연 유태민족에게 그같은 권리가 있는가? 그들 조상의 일부가 2천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 대답은 부정적이다. 말세가 되면 황금시대가 팔레스타인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는 유태교의 종말론적 예언이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유태인의 주관적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결코 없다. 더우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손을 번성시키고 땅을 경작하며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가꾸어온 것은 아랍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기네 종교의 메시아적 상상과 예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단지 ‘외래 식민주의자’에 다름아닌 존재였다.
더우기 시온주의자들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고,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무력으로 축출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 속에서도 끈질기게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유지해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의 발전,네게브 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치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것일지라도, 식민주의의 조종이 울리고 아랍민중이 자신의 민족적 주체성에 눈뜨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우기 미국과 영국,프랑스의 식민주의를 거부한 아랍민족이 유독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만을 이해하고 용납할리는 만무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에 의해 축출하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국수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천 년에 걸쳐 당해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자기의 불행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찌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정당한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식민국가 이스라엘이 밀물처럼 밀려든 이민자들을 먹여살리고 삼면을 포위한 적대적 아랍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유태인들이 보내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의 배상금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미국이 시온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은 아니지만,개입과 간섭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아랍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스라엘을 충분히 이용했다. 때문에 향후 아랍인들의 반(反)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팔레스타인문제는 중동 일대 아랍국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통일 아랍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던 아랍민중은 이스라엘을 심장 깊숙이 들어와 박힌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어느 나라의 지도자이든 이스라엘과 타협할 경우 민중의 저항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모든 가능한 기회를 활용하여 아랍 국가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유태국가의 토대를 더욱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복잡하기 이를데없는 아랍 각국의 혁명세력은 국내의 지배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문제를 활용하려 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문제는 아랍 진영 내부의 갈등과 복잡하게 얽히게 되 었다.
제 1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전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압둘 낫세르는 혁명 4주 년을 맞이하여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운하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폐기한 것이다. 그러자 격분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과 비밀협정을 맺어 수에즈 탈환을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이스라엘군은 돌연 시나이반도를 가로질 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불의 군대가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의 실패로 인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상실했으며,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꾸었다. 낫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아랍국가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월 에 소집된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인의 대표로 구성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출현한 것이다. 아랍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들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했다.
바야흐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혜와 힘에 의지하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다. 그러나 PLO의 앞길이 순탄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군주국이 대다수인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의 정면충돌이 두려워 PLO의 군대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만이 PLO를 지원했다.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자주적으로 소규모의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기습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을 공격했다. 이같은 사태가 계속 확대 심화되어갔다.
1967년 6월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 되었다. 6일간의 전쟁에서 아랍연맹은 또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PLO의 온건노선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을 비롯하여 수많은 급진적 게릴라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는 물론이요,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세계의 수구(守舊) 집권층, 미국까지를 공격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1968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대 PLO 의장으로 선출했다. 70년 9월에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낫세르가 암살됨으로써 PLO는 더욱 불리한 정세에 직면하였다.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낫세르와는 달리 후임 대통령 사다트는 국유사업체를 민영화하고 미국에 접근하는 등 우경화된 정책을 시행 했기 때문이다.
PFLP는 서방 측의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하여 이집트와 요르단의 사막에서 폭파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고 있던 요르단왕 후세인은 즉각 미제 전투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인민 섬멸 작전을 전개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동족의 손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70년 9월의 일이다. 이같은 동족상잔을 기억하기 위해 좌익 게릴라들은 ‘검은 9월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뮌헨 올림픽 선수촌 기습사건의 주인공이다.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전 세계적 긴급문제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다름아닌 석유 금수조치 때문이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카타르, 아랍 토후국 연방 등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은 석유의 공시가 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했다. 이란을 제외한 다섯 나라는 석유 생산의 25%를 삭감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자원을 무기화함으로써 서방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아랍의 힘은 세계를 뒤엎었다. 닉슨은 계속해서 하루 1천톤씩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지만 아프리카와 유럽,제3세계, 일본까지도 재빨리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결사적인 테러행위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난민촌 습격, 학살과 파괴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미군 숙소 건물에 뛰어들어 산화하는 소녀 테러리스트의 행동은 세계인을 소름끼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75년 이후에는 35만의 난민이 거주하고 있는 레바논이 이스라엘 민병대와 게릴라의 군사충돌로 인해 무정부상태의 전쟁터로 변하였으며, 그 상태는 벌써 15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사다트는 1979년 3월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보증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댓가로 시나이반도를 되돌려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사다트는 아랍 민족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란一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만을 둘러싼 미一이란 군사충돌 로 인해 팔레스타인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감이 있다. 그러나 1979년 1월,미국의 앞잡이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이슬람교 승려 호메이니를 지도자로 한 반미 민족혁명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배척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를 배신한 아랍국가들의 반동적 군주들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처럼 이라크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이 없는 한,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크고작은 테러와 이스라엘군 및 민병대의 보복 학살, 이란一이라크 전쟁,끝을 예측할 수 없는 레바논 내전, 이 모든 중동사태는 본질적으로 미국과 시온주의자들의 식민주의와 침략에 대한 아랍민족의 거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이 유태민족의 나라를 세운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운명이, 그리고 그 땅에 정착한 시온주의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박해가 박해를 낳고 불행이 불행을 가져오며 증오가 증오를 부르고 테러와 보복 학살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분명한 것은 전 세계의 평화애호 국민과 양심인들이 민족의 자결권과 정든 고향땅을 탈환하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편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1974년 11월 1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 복장을 입은 채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유엔총회 단상에 오른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합법정부” PLO 의장 아라파트의 제안이 실현되는 날에야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은 전 세계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무력과 탄압에 의해 강제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비자발적 유배상태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토와 재산,그리고 한 민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전 세계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자신의 고유한 영토 위에 민족 주권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호소합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가지(화해의 상징)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戰士)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가 던져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는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소생할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PLO의 공식 대표로서,또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한 지도자로서 현재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들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유태인 들에게 선언합니다. 내일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우리 모두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들의 전망 속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장 관대한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 단일민주국가를 수립하여 우리 모두가 정의로운 평화 속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유태인들에게 권고합니다. 그곳에서야말로 기독교도, 유태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정의 평등 우애,그리고 발전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은 그것이 탄생한 이래 인종적, 종교적 동기에 의하여 고무된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목표는 유태인 개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전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건물(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모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미국)에 대하여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들과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의 이익에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나는 미국과 아랍세계 전체 사이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해서 알기 쉬웠나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오니 필요하신분은 댓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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