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불의 저주를 퍼부은 첫번째 제국주의 세계 전쟁이 끝난 후 세계는 다시 ‘영원한 번영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았다.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 배상금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고 아시아 아프리카의 식민지 종속국 민중들은 변함없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은 눈부신 경제적 부홍을 이루었다. 치열한 군비증강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국제정치의 표면에서는 국제연맹이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쟁이 ‘아득히 멀어져 간 옛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혼란에 빠졌던 세계 경제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영국을 중심으로 한 금본위 체제가 회복되었다.
특히, 1차대전 기간을 통해 30억 달러의 대외 채무를 지고 있다가 일약 1백 5십억 달러의 채권국으로 변신한 미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전후 경제부홍을 계기로 돈을 벌었다. 세계 경제가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는데 따라 신흥부국인 미국의 뉴욕 ‘월가’(Wall Street) 증권거래소는 날마다 오르기만 하는 증권을 사기 위해 모여든 투자가들로 북적거렸다.
1776년 아담 스미스가 그의 저서 r국부론』에서 예찬했던 신(神)의 손, 즉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 이기심의 추구를 사회 전체의 조화로운 발전으로 인도해준다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은 1929년의 세계 자본주의를 ‘영원한 번영’의 꼭대기까지 끌어올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마음속으로 그 자비로운 손길을 경배해야 마땅할 것 같았다. 모든 절망과 비관은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장미빛 낙관만이 세상을 지배했다.
1929년 10월 24일은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월가’의 한 빌딩 꼭대기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래에는 한순간 수백명의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가 틀림없이 뛰어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다른 일 때문에 옥상에 올라간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경꾼들의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날 하루 동안 이유없이 ‘신의 손’으로부터 버림받은 무려 11명의 주식 투자가들이 실제로 자살했기 때문이다. 대공황 24일은 여느날과는 다른 날이 되었다. 월가의 주식값이 최초로 큰 폭의 하락세를 기록한 날로서 전대미문의 파멸적 타격을 인류에게 가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날을 일컬어 ‘암흑의 목요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닷새 뒤에 다시 한번 주가의 대폭락이 일어났다. 이날 월가의 주식 값은 무려 43%나 떨어졌다. 그리하여 11월에는 9월의 절반을 밑도는 수준으로, 그리고 다음해 7월에는 29년 9월의 8분의 1 수준으로 하락 했다. 그 여파로 미국에서는 5천여 개의 은행이 부도를 냈고 수만개의 기업이 파산했는가 하면 9백만 명의 저금통장이 쓸모없는 종이 파지로 변하고 말았다.
뒤이어 베를린, 파리, 런던, 동경의 증권거래소에도 주가 폭락의 풍파가 몰아닥쳤다. 월가를 덮친 ‘목요일의 암혹’은 이미 서로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던 세계 경제의 흐름을 타고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공장 모든 가정에 빠짐없이 찾아들어 음울한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공황은 자본주의가 태어나면서부터 안고 나온 일종의 ‘원죄’ 였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었듯,자본가가 돈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제도가 생기면서부터 인간사회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공황의 고통을 떠안게 된 것이다.
공황은 19세기부터 10여 년을 주기로 반복되어 온 것이었기 때문에 1929년의 공황은 어느 정도 예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엄청난 폭락의 공황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1920년대에는 선진 공업국의 생산력뿐만 아니라 식민지와 후진국들의 각종 농산물과 원료 생산도 크게 증가하였다. 더우기 공업분야에서는 눈부신 기술발전으로 최신기계가 도입됨으로써 일자리가 줄어드는 동시에 생산량은 급증했다. 따라서 팔아야 할 상품은 많아졌는데 소비자의 구매능력은 크게 늘어나지 않는 현상이 생겨났다.
농산물과 원료의 재고가 점점 쌓이자 1920년대 중반에 농산물 가격이 반으로 폭락하는 농업공황이 식민지와 후진국을 휩쓸었다. 식량값이 떨어지면 임금을 더 하락시켜도 되는 자본가들은 잠시 기뻐했지만 공업 생산에도 공황의 조짐은 서서히 일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1925년에 정점에 이른 건축업이 그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29년 6월을 고비로 공업 생산지수도 하락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주식값은 1929년 내내 상승일로였다. 경기가 계속 좋으리라는 전망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주식을 사려고만 덤볐다. ‘영원한 번영’이라는 신화를 신봉한 미국인들은 이제 서부의 금광을 찾아헤매 는 대신 증권거래소에서 한몫을 잡으려고 몰려들었다. 주식을 사서 갑부가 되었다는 점원이나 간호원의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떠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비교적 부유한 의사나 지식인들이, 다음에는 장사꾼과 샐러리맨들이,맨 나중에는 운전사와 공장노동자,가정주부들까지도 주식을 모았다. 백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주식 소유자가 되었다. 현금이 없는 사람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돈을 꾸거나, 자신이 살 주식을 미리 담보로 잡히고 대부금을 받아 주식을 샀다. 이리하여 주식값은 터무니없이 치솟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 경기 전망이 흐려지자마자 주가 하락을 염려한 투자가들이 주식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주가는 더 하락했다. 더 많은 주식이 쏟아져나왔다. 주가는 더욱 하락했다. 이제 주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손해를 볼 상황이 벌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지 못해 안달이던 투자가들이 주식을 팔지 못해 법석을 피웠다.
이같은 과정이 24일 하루만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암혹의 목요일’ 이후 똑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10월 1일 뉴욕 주식시장에 상장된 주식의 총액은 8백 70억 달러였는데, 11월 1일에는 5백 50억 달러, 1933년 3월에는 1백 90억 달러에 지나지 않을 만큼 주가는 곤두 박질만을 거듭한 것이다. 7백억 달러에 가까운 거금이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은행돈을 꾸거나 주식을 담보로 대부받은 투자가들은 자기가 가진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파산하여 집과 땅까지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대출해준 돈을 회수할 수 없는 몇몇 은행들이 부도를 냈다. 그러자 은행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사람들은 예금통장을 들고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예금을 돌려 받기 위해 아우성을 쳤지만 은행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예금의 일부만 지불준비금으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대출해버린 탓으로 한꺼번에 밀려든 고객들의 현금 인출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5천여개의 은행이 추풍낙엽마냥 쓰러졌다. 당시에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의 생 각이었기 때문에 은행의 파산을 막아줄 중앙은행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금구좌를 잃어버린 소비자가 지출을 줄였기 때문에 물건을 팔지 못한 기업들이 잇달아 무너졌다. 불경기가 올 것이라는 투자가들의 예감이 주식값의 폭락을 부르더니,이번에는 주가 하락이 거꾸로 불황을 부채질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상스런 사회가 나타났다. 창고에 식량과 옷과 석탄을 그득 쌓아두고 그 밖에서 헐벗고 굶주린 채 얼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그렇게 살거나 혹은 살다가 비참하 게 죽어갔다.
상점과 공장의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지만 가난한 소비자들에겐 돈이 없었다. 공장주는 생산량을 줄이고 물건값을 내렸다. 그에 따라 실업자가 늘어났다. 상품은 너무 많은데 살 능력이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쉴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공장과 기계는 그대로 있었고,일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었다.
상점의 진열대도 그대로였고 은행에서 발행한 현금 또한 그 누군가의 금고 속에 있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자본가는 공장을 돌릴 수 없었다. 팔리지 않는 재고품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사랑스런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공장이 가동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실업자의 처지에 빠졌다.
야적장에는 석탄이 그득 쌓여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겨우내 떨며 살았고 아이들은 석탄을 훔치러 돌아다녔다. 캘리포니아의 농장주들은 오렌지값이 밑바닥을 더듬자 공급을 줄이기 위해 오렌지를 땅에 묻거나 석유를 뿌려 썩였다.
그러나 농장 울타리 밖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가난뱅이들이 오렌지를 훔치려다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심지어 농장 경비원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고 생산량을 몇 배나 높이는 신품종 오렌지를 만든 과학자들은 창고를 가득 채우는데 크게 공헌했지만, 그것을 합리적으로 나누어 쓰는 이치에 대해서는 백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공황으로 인해 고통받은 것은 아니다. 부자는 더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쓰러져가는 경쟁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고 떨어진 주식을 휴지값으로 긁어모았다. 공황의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더 큰 독점자본가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한편에는 엄청난 부가, 다른 한편에는 빈곤이 켜켜이 쌓여갔다.
부잣집 아이들이 개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귀중한 아이들은 썩은 감자를 먹으며 자랐다. 부잣집 마나님이 우유로 목욕을 하는 동안, 그 집 담벼락 아래서는 굶주린 거지 아이가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대도시의 구호소 앞에서 빵을 배급받기 위해 긴 행렬을 이룬 실업자들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파괴당했다.
장래에 대한 희망과 신뢰의 상실, 처자식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회의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 모멸감에 떨며 살아야만 했다. 각지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실업자들의 항의시위가 일어났고,1932년에는 1만명의 제대군인들이 연금을 앞당겨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워싱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같은 절망적인 시위는 그때마다 군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산업의 발달은 순식간에 재앙으로 돌변하여 인간을 엄습했다. 자신이 불러낸 거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동화 속의 어린아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양의 재화를 나누어 가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경제의 불황은 곧장 전세계로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서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매년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려 그 돈을 유럽과 세계 각지에 투자하고 있었다. 유럽은 미국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서 자국의 상품을 최대한으로 수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불황이 시작되자 유럽에 대한 투자를 줄이가 시작했다. 유럽 상품 수입도 줄였다. 유럽 나라들은 돈이 부족해서 미국의 상품을 살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각국에는 보호무역주의의 물결이 일었다. 자국의 시장은 폐쇄하거나 관세를 높였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무역수지 적자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교역상대국과 수출입 액수를 맞추려고 하는 *2자간 국제수지 균형’정책이 채택되었다. 여러 나라와의 교역의 결과 전체적으로 수지 균형을 맞추는 ‘다자간(多者間) 무역수지 균형’ 대신 모든 나라들과 일일이 수출입을 맞추려니 자연히 국제적 무역전쟁이 벌어 지면서 국제 교역량이 격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등 모든 나라가 더욱 심한 불황에 빠져든 것이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당시의 불황의 심각성은 몇 가지 통계수치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23년부터 25년 사이의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았을 때, 1933년의 공업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의 임금은 38 수준으로 하락했다. 실업자는 1930년에 3백만, 33년에 1천 5백만으로 늘어났다. GNP는 8백 50억 달러에서 1930년 6백 80억, 32년에 는 3백 70억 달러로 떨어졌다. 미국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세계 경 제도 한가지였다. 세계 공업생산액의 평균을 100으로 할 때, 1929년 2/4분기에는 113.1 이었으나 1932년 3/4분기에는 65.9에 불과했 다. 29년〜32년 사이에 세계무역량은 70.8%나 감소했고 실업자는 5천 만 명을 훨씬 넘어설 정도였다.
대공황은 생산력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온 ‘영원한 번영’을 기대하는 낙관적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 대공황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 즉 “각자가 자유롭게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면 그것을 아름다운 사회적 조화로 이끌어주는 신의 손” 이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신의 손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이기심을 생산의 극대화로 이끄는 데는 큰 힘을 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산된 재화를 조화롭게 나누어주는데는 전적으로 무능했다.
그러면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무도 법으로 강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같은 대도시에 하루도 빠짐없이 방대한 양의 식료품이 공급되고 사람들이 살 집을 짓고 아침마다 가정에 신선한 우유가 어김없이 배달되도록 하는 힘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신의 손’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 부성”이었다.
한 사회에서 어떤 상품이 얼마만큼, 생산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되어야 하는가, 노동자의 임금은 얼마나 주어야 하고 어떤 상점이 어디에 몇 개나 있어야 하는가? 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이같은 결정들을 내리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수없이 많은 생산자들은 오로지 이윤이 얼마나 높일것인가 라는 한 가지 기준에 의해 생산품의 종류와 수량을 결정하고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으로 생산했다.
소비자는 한정된 액수의 돈을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지출했다. 자본가들의 성패는 시장에서 판가름났다. 가격의 변동이 그 지표였다. 가격이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생산량을 줄이고 높아지면 생산량을 늘였다. 그야말로 무정한 부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폐를 가진 사람의 구매력이다.
자본주의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싹싹하고 자상하지만 가난뱅이에게는 더없이 냉혹한 존재이다. 그것은 목욕할 우유를 원하는 부잣집 마나님의 요구에는 지체없이 응하지만 그 집 담벼락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져가는 거지 소년이 갈망하는 한 잔의 우유에 대 해서는 아는 체하는 법이 없다.
만일 사회구성원의 대다수가 거지 소년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유 회사는 망하고 말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같은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상품에 대한 사회 전체의 요구나 구매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별 자본가의 경제 전망과 이윤 추구욕에 의해 생산물의 종류와 수량이 결정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결국 대공황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라는 신화적인 가식을 벗고 놀란 인류의 눈앞에 그 음험스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만,당시까지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은 실업이나 상품의 과잉생산으로 인해 경제공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궁핍화와 생산능력의 빠른 발전으로 인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난 다’’고 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에 불과하다고 비웃었다.
1870년대에도 각국에 심각한 불황이 있었고 10여년 을 주기로 그것이 반복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황의 실재는 커녕 그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품은 상품에 대해 출구를 열어준다”고 주장한 이래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에는 “공급은 같은 크기의 수요를 만들어낸다”는 소위 ‘판로설’이 십계명처럼 붙박혀 있었다.
그들은 주장했다. “어떤 상품의 일시적인 과잉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가격이 떨어지게 되고 소비자는 가격이 높은 다른 상품 대신 그 상품을 구매하기 때문에 수요가 늘어난다. 또 부족하게 공급된 다른 상품의 값은 올라가 생산자는 공급을 늘이게 된다. 그래서 시장의 균형이 회복된다. 모든 상품이 동시에 남아도는 전반적 과잉생산 공황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또한 항상적인 실업도 인정하지 않았다. 실업자가 있으면 임금이 내려가 자본가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어 실업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은 기껏해야 일시적이거나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실업자란 단지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들은 대공황이 콧잔등을 후려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의 손’을 기대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였던 어빙 핏셔(Irving Fisher) 교수조차 경제가 조만간 회복될 것이라고 낙관했으며, 미국 대통령 후버는 경기가 최악의 상태에 접어든 1932년에 “이미 공황은 끝났다”고 큰소리쳤을 정도이다.
그러나 믿든말든 과잉생산 공황은 현실로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의 1926년 물가지수를 100으로 볼 때, 1933년에는 65.9를 기록했지만 여 전히 상품은 남아돌고 있었다. “조화로운 세계로 이끌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를 ‘하나의 신앙’으로 여기고 있던 구미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현실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한 최초의 학자는 1936년에야 나타났다. 영국의 케인즈(丄 M. Keynes)였다. 그는 자본주의를 유지 하면서 그 병폐를 치유할 나름의 처방을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제시하였다.
그는 불완전고용 상태에서 국민경제가 균형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비자발적 실업자, 즉 일하고 싶고 일할 능력이 있으면 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올 인정했다. 그리고 유효 수요,즉 화폐로 뒷받침되는 수요의 부족으로 인해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결함을 인정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최초의 부르조아 경제 학자였던 것이다. 정부가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를 고용하는 등 재정지출을 많이 하면 국민소득이 중가하고,소득이 증가하면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중가하며,수요가 늘어나면 생산설비를 늘이기 위한 투자와 고용이 증가한다. 그러면 다시 소득이 증대한다. 케인즈의 처방은 바로 정부의 재정지출을 늘이라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재무부가 낡은 병에 돈을 가득 채워 그것을 폐기된 탄광에 적당히 묻고, 그 위에다 도시의 쓰레기를 덮은 다음 많은 시련을 겪은 자유방임의
원리 위에서 사기업으로 하여금 그 돈을 다시 파내어 쓰게 한다면...... 더이상 실업이 있을 필요는 없다. ......주택을 건설하면 더욱 현명한 일 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 실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더 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귀기울이는 정치가는 별로 없었다. 당시까지는 ‘완전한 자유경쟁’, 혹은 ‘자유방임주의’만이 최선의 경제제도이며,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도 혐오스러운 죄악으로 간주 하는 분위기나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경제활동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공산주의자나 하는 선동으로 비난받았다.
때문에 케인즈는 한동안 공산주의자이냐는 질문을 기자들로부터 받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오래지 않아 유럽과 미국의 경제학계를 정복하고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 경제관료들을 추종자로 만들고 말았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케인즈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날 재정 정책은 자본주의 정부의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었으며,케인즈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가는 곧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대공황은 그 자체가 현대 세계사의 대사건인 동시에 제1차 세계대 전 이후 세계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벌이던 암투로써 또 한번의 공공 연한 대량학살 전쟁의 불바다로 폭발시켰다.
공황이 전세계로 번져나가자 각국은 해외에 투자한 자본을 속속 철수시키는 한편, 자국이 보유한 외화를 금으로 바꾸어 국내로 반입했다. 당시의 금본위제 아래서는 은행에서 화폐를 금으로 교환해주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중금주의(重金主義) 무역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마침내 1931년 9월, 영국이 금의 태환을 중단함으로써 금본위제는 다시 무너졌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양이 부족해짐으로써 세계 무역량은 더욱 줄어들었고 열강들은 경기회복을 위한 통제 경제를 실시했다. 1932년 영연방 국가들이 오타와에서 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를 외국에 대해 봉쇄하고 높은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하자 다른 강대국들도 앞다투어 블럭(Woe) 경제를 형성했다.
세계는 이제 파운드,달러, 엔,마르크,프랑 등 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제국주의 강대국과 그 연방 및 식민지를 한데 묶은 몇 개의 블럭으로 분할되었다. 무역전쟁은 각국의 군비 증강을 노골화시켰고, 국제연맹은 있으나마나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 로 한 “세계 평화와 영원한 번영의 시대”는 영원히 가고 악몽 같았던 세계전쟁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 강대국의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실업과 빈곤을 저주하면서 더욱 맹렬하게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벌였고 식민지와 종속국의 수억 민중은 민족해방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고 본국 정부와 싸웠으며,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이들의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국내의 혁명운동을 억누르고 식민지의 해방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부들은 가혹한 탄압정치를 실시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동반자가 아니라 적인 것 처럼 보였다. 민주주의의 전통이 강한 영국과 미국등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자본주의를 수정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전통이 미약 한 일본,독일 등에서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하고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파쇼체제, 즉 나찌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탄생했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먼저 케인즈의 제자가 된 정치가는 다름아닌 히틀러였다. 1차대전의 패배로 인한 고통과 대공황의 경제적 곤란을 교묘히 이용한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선동하여 ‘위대한 독일제국’이라는 국가주의적 환상을 부활시키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그는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 간부들, 자유주의적인 성직자와 지식인들을 잡아넣을 경찰서와 교도소를 짓고 군사시설을 늘이면서 군수품 생산을 확대했다.
그리고 군인,경찰, 비밀경찰과 돌격대 등의 폭력조직,교도관들의 수를 늘임으로써 실업을 줄이고 케인즈가 말한 ‘유효수요’를 창출했그리고 전쟁물자 생산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재정지출을 늘여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공황의 수렁을 벗어났던 것이다. 일본 역시 군국주의적 선동과 전시 통제경제를 강화하고 중국 대륙을 침략함으로써 불황의 파도를 넘어갔다.
미국과 영국은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수정했다. 정부가 건설과 전력 등 공익사업에 직접 개입하여 사업을 일으키고 독점을 규제하는 법률을 만들었으며, 노동자의 임금결정에도 개입하였다. 가장 대표적인것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었는데 자본가들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데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직접적 복지 증진도 가져오지 않는 낭비적 군수산업의 확장 때문에 각국 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식민지를 최대한 착취했다. 그러나 국내의 자원과 시장이 빈약한 독일과 일본의 경우 기존의 식민지만으로는 그같은 군사경제, 독점자본주의체제를 장기간 지탱해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약소국을 침략하거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덤벼들었다. 유럽과 중국대륙, 대서양과 태평양, 아시아와 인도양 등 실로 전 세계에 걸친 현대전쟁이 벌어졌고 수천만 명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이 전쟁의 포연 속에 사라져갔다.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이며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인간은 대공황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와 이론을 만들었다.
우선,완전한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황을 낳는다는 것 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가 신의 손에 의해 조화로운 세계에 도달하는 최선의 경제제도라고 떠들지만, 속셈으로 각국 정부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보다는 ‘보이는정부의 주먹’을 훨씬 더 신뢰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대공황의 혼란중에서 중앙은행,즉 연방준비제도라는 중앙은행을 만들어 통화 량을 조절하고 외환을 관리하며, 시중은행이 도산할 경우 예금주의 피해를 막아 은행에 대한 신용도를 높였다. 또한 누진세라는 것을 만들어 호경기에 소득이 높아지면 자동적으로 세율도 높아져 소비를 억제하고 불경기에는 그 반대작용을 하게 함으로써 경기변동의 폭을 줄이는 지혜를 터득한 것도 공황의 경험에서였다.
오늘날 임금, 물가, 통 화량, 공공산업,수출입 등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없이도 버틸 수 있 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 부르조아 학자들은 이를 일컬어 듣기 좋게 ‘복지국가’라고 부르지만 ‘수정자본주의’ 쪽이 훨씬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대공황은 인류의 현대사에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도 공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원인 에 대한 학설도 참으로 다양하다. 지금까지도 경기변동은 수시로 인간생활을 뒤흔들곤 한다. 케인즈의 처방도 낡아버렸다. 지나친 재정 지출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으며,최근 몇십년간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세계 경제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현대의 고질병의 원인은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은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엄청난 재화와 더불어 가난과 실업의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을 대량생산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상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는 그러한 경제제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진리야말로 대공황이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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