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선 철도의 러시아 방면 종착역인 핀란드역은 페트로그라드 교외에 있는 초라하고 작은 정거장이다. 1917년 어느 봄날 그 작은 정거장에는 늦은 오후까지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었고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열차 한 대가 도착했다. 무수히 많은 붉은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고 입구에는 군악대가 프랑스혁명의 노래인 ‘라마르세이에즈’를 연주했다.
역광장 한 켠에는 장갑차가 서 있었고 써치라이트가 광장 일대를 비추었다. 핀란드역에는 황제 전용 휴게실이 있었는데 중산모를 쓰고 코트의 앞단추를 풀어젖힌 작달막한 남자가 커다란 장미꽃 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간부들의 환영사를 건성으로 들어넘긴 후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사랑하는 동지들,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 나는 여러분과 더불어 러시아혁명의 승리를 맞이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체에 있어서 내란의 시작을 뜻합니다. 전세계적 사회주의혁명의 새아침은 이미 밝아오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미 세상이 들끓고 있읍니다. 조만간 유럽의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붕괴하고 말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혁명은 여기에 대한 신호탄이며 새시대의 길을 연것입니다. 세계 사희주의혁명 만세 !
군중은 홍분과 격정 속에 빠져들었다. 미친듯이 ‘라마르세이에즈’ 를 부르며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수병들은 받들어총을 하여 예의를 표했고 시베리아의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눈물을 홀리며 그를 환영했다. 군중은 오직 한 마디 말밖에 외칠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한 마디는 바로 “레닌 ! ”이었다. 핀란드역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즉 레닌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귀국 환영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부인 크루프스카야와 함께 스위스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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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을 예언한 마르크스一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을 현실의 사회주의혁명으로 실현시켜낸 혁명가이다. 그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엄청난 드라마 속에 자신의 인격적 영향을 깊숙이 새겨두었다. 그가 없이는 러시아혁명을 이해할 수 없고,러시아혁명의 흐름 가운데서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이 바로 레닌인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끼는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처음 보았다.......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특히 위대한 인물 이었다”고 말했다.
레닌은 볼가강 연안의 심비르스크에서 1870년 4월 22일에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가 몽고계 타타르인이었던 탓으로 레닌은 러시아인 치고 는 눈에 띄게 불거진 광대뼈와 낮은 코,깊고 작은 눈등 몽고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성실한 교육관리로서 여섯 아이를 낳았으나 레닌이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과로로 사망했다.
어머니 마리아는 혁명운동과 관련하여 최소한 한번 이상씩 체포된 여섯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갖은 고생을 했으나 레닌이 혁명 러시아의 수반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6년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영어와 독일어,프랑스어의 기초를 가르치고 러시아 소설을 읽어주는등 자녀들의 지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현숙한 부인이었다. 장남인 레닌의 형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닮아 키가 크고 사색적인 얼굴의 소유자였다.
우유처럼 횐 살결과 숱이 많은 머리칼, 짙은 눈썹, 조각처럼 잘생긴 알렉산더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과학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닮아 키가 작고 머리는 달걀처럼•생긴 데다가 눈이 작고 20대에 벌써 대머리가 될 정도로 머리숱이 적은 레닌은 떠들썩하고 공격적이며 역사와 문학,특히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심비르스크의 고등학교에서 형제는 언제나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페테르스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동물학을 전공하던 알렉산더는 점차 과격한 사상에 젖어들어 1887년에 황제 알렉산드르3세를 암살하기 위해 여섯 명의 청년들과 함께 폭탄을 만들다가 사전에 체포되었다. 마침 동생의 숙소를 방문했던 장녀 안나도 함께 체포되었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 더 훌륭한 죽음은 없다. 그러한 죽음은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는다. 나는 불로한 러시아 인민들을 돕겠다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졌을 뿐이다” 하는 늠름하고 유창한 연설로 가족과 재판관,황제까지도 감동시켰지만 알렉산더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안나는 석방 되었다.
러시아 도처에서 각종의 혁명 조직이 싹트기 시작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형의 처형 소식을 접한 레닌은 매우 냉정한 사람으로 변해 갔으며 혁명이라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볼가강 중류 지역의 카잔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사소한 교내시위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사형수 알렉산더’의 동생임이 밝혀져 제적되고 카잔에서 추방된다.
레닌은 외가로 추방되어 먼저 와 있던 안나와 함께 책을 읽거나 장기를 두면서 소일했다. 어머니 마리아가 여러가지로 애를 쓴 끝에 카잔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잔에서 약 1년 동안 4년 대학과정을 독학하여 법과대학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1892년 법률사무소에 취직해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모두 독파했다. 그는 러시아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계와 보고서, 각종의 논문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정리 했다. 레닌은 농민들을 계몽함으로써 전제정치에 대항하게 해야 한다는 나로드니키의 주장 대신에 무산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추진력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공장노동자들이 있는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다. 그의 나이 23세 1892년 가을이었다.
페테르스부르크로 온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 서클을 찾아 거리를 떠돌며 소일했고 점차 “볼가 지역에서 온 박식한 마르크스주의자”로 혁명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해 봄, 파티를 위장한 한 마르크시스트 집회에서 평생의 동지요,비서요, 반려자가 될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레닌보다 두 살이 많은 스물여섯 살로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여성 혁명가였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문맹퇴치반에 참가하여 노동자들에게 자본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레닌은 짜르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혁명운동 진영 내부의 그릇된 경향을 몰아내는데 집중되었다. 그는 맨 처음에 당시 혁명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나로드니키와의 대결에 착수했다. 레닌은 1894년에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와 어떻게 싸우는가?』 라는 소책자를 써서 나로드니키의 비과학적이고 환상적인 견해를 통렬히 공격함으로써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확실히 했다.
다음으로 레닌은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짜르 경찰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나로드니키 사이의 격심한대립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하고 알렉산드르3세를 또 암살하려다 실패한 무리가 바로 나로드니키니까, 그 나로드니키를 상대로 다분히 학문적인 말투로 싸우는 마르크스주의자 쪽이 보다 덜 위험하 다고 생각한 것이다.
짜르의 검열관들은 나로드니키를 맹렬히 공격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의 출판을 기꺼이 허용해주었다. 그러자 지식인층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광범위하게 이뤄져 마르크스주의가 급속하게 확산되어 나갔다. 따라서 짜르 검열관들의 허락 아래 전파된 이 ‘합법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성을 거세해버린 것이었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이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을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짜리즘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반대하여 혁명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상은 출판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란 그저 호기심 많은 인텔리들의 말장난 소재이거나, 잘해야 사회주의란 돌연한 혁명으로가 아니라 일련의 개혁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유포할 뿐이었던 것이다. 레닌은 당시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피터 스트루베를 통박하는 서평을 썼다. 체제 내에서의 개량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레닌은 1895년, 자신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페테르스부르크에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당시 러시아에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자 서클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서 혁명적 지식인과 일반 노동자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었다.
레닌은 수도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이 파업을 지원하고 노동자들을 짜르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단을 살포하고 「노동자의 대의」라는 신문을 제작했다. 그러나 그 신문은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짜르 경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경찰이 제작 현장을 급습했기 때문이다. 레닌도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14개월을 지낸 후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한편 그의 연인 크루프스카야도 8개월 뒤 체포되었다. 그리고 역시 3년의 유형을 선고받았다. 둘은 레닌의 유배지인 슈센스코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레닌은 유배지에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 이라는 유명한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 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었음을 치밀 하게 논증한 것으로서 농민의 혁명성, 농촌공동체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을 고집하는 나로드니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한편 그가 당 건설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1898년, 민스크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것은 대회 직후 짜르 경찰에 의해 궤멸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레닌에게 있어서 세번째의 적이 출현했다. 그것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운동, 그 영향으로 러시아에 나타난 ‘경제주의자’ 들이었다 . 마르크스주의의 총본산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파멸을 예고한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적인 부의 증대에 따라 위기가 사라지고 격변이나 혁명이 없이도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서서히 이행해나갈 것이라는 사회개량론을 제시하면서 체제 내의 개량적인 투쟁을 주장한 것이다.
일시적인 경제호황을 누리던 러시아에서도 그 추종자들이 나타나, 짜르에 대한 정치적인 투쟁보다는 노동조합이나 임금인상을 지원하고, 민주화를 위해 짜리즘과 싸우는 자유주의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사회주의 지식인의 할일이라는 주장이 풍미했다. 레닌은 유배지에서 17명의 정치범을 불러모아 이를 비판하는 ‘17인의 항의’를 발표함으로써 반격을 시작했다.
1900년 초 3년 형을 마친 레닌은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여러가지로 쓰던 익명을 모두 버리고 레닌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인 플레하노프와 망명 혁명가들을 규합하여 『이스크라Klskra: 불꽃)라는 정치신문을 만들어 국내로 반입시켰다. 레닌에게 있어서 "이스크라" 는 단순한 신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기회주의,타협주의,수정주의에 투쟁하는 십자군 이었고 “집단적인 선동자요 조직자”였으며, “개개의 계급투쟁과 대중의 분노의 불꽃을 전체적인 큰 불로 확대시켜주는 거대한 풀무”여야 했다. 그는 이스크라의 통신망과 배포망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전 러 시아에 산재한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고, 러시아의 구석구석 모든 지역과 공장에서 뉴스와 정보를 수집하며, 불굴의 투지를 갖춘 훌륭한 비밀요원을 뽑아 당에 가입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전 노동자 대중을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게 할 계획이었다.
"이스크라" 집필진과 기고자,요원들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끌어나갈 참모본부를 이루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는 1902년 3월에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라는 팜플렛을 출판하여 자신의 혁명이론과 당조직의 이론을 밝혔다. 이것이 바로 후일 ‘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원형이다. 그는 이 책에서 베른슈타인주의자와 경제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 아니면 당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노동계급만으로는 또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오직 노동조합 의식만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조합주의는 부르 조아지에 대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적 예속을 의미한다......우리의 과업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날개 아래 노동운동을 옮겨놓는 것이다.......
노동자가 어떤 계급의 영향을 받든간에 모든 종류의 폭정, 억압,폭력, 남용에 대응하도록 훈련되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진정한 정 치의식으로 될 수 없다. 그는 경제주의자들을 일컬어 가장 낙후한 대중의 뒤를 따르는 ‘꽁무니주의자’라고 격렬히 비난하면서 또한 당을 ‘혁명가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만들려는 경제주의자들의 ‘민주주의 원칙’ 을 비웃었다.
민주주의에는 우선 공개토론이 있어야 하고 모든 직능을 선거제로 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당대회가 공개적이니까 민주주의로 나갈 여지가 있지만 비밀공작이 필요하고 그 혁명활동의 각 분야에서 만사에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단체가 어떻게 민주주의 방식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누가 훌륭한 노동자인지 그 정체조차 일반대중이 모르게 되어 있는 판국에 민주적 선거가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멀리 유럽에 망명하여 실정을 모르고 일반론만 가지고 호언장담하는 자들만이 우리를 평하여 반민주적이니 어쩌니 떠들고 있을 따름이다. 전제정치의 암혹 과 헌병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당 조직의 광범한 민주화란 결국 백해무익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장난감식의 민주주의를 생각할 필요는 없고...... 다만 책임감이 강하면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혁명가 단체는 못마땅한 당원을 서슴지 않고 떨쳐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광범위한 노동자의 대중정당’이 아니라 ‘강철 같은 규율을 가진 혁명적 전위정당’ 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이같이 사회주의혁명의 ‘목적의식성’과 ‘혁명적 전위당 이론’에 찬성한 혁명가들이 볼세비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레닌은 이 책을 발표함으로써 혁명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아울러 "이스크라" 의 명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1902년 말,‘페라’(펜이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이스크라"에 뛰어난 글을 보내오던 한 청년이 런던에 체류 중이던 레닌을 찾아왔다.
그는 시베리아의 유형지를 탈출해나왔는데 본명이 레프데이비도비치 브론슈타인, 즉 나중에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열혈청년이었다. 레닌은 즉각 그를 "이스크라" 편집진에 불러들었다.
레닌은 주도면밀하게 제2차 당대회를 준비했다. 1903년 7월 30일 벨기에 브뤼셀의 밀가루창고에서 열린 당대회에는 51표의 의결권을 가진 43명의 대의원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중 이스크라파의 대의원은 22표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내 자치권 불인정을 이유로 유태인 동맹 대표들이 퇴장하는 등 여러 대의원들이 퇴장함으로써 레닌은 다수파 (볼세비키)가 될 수 있었다.
반면 마르토프를 필두로 한 그룹은 소수 파(멘세비키)로 떨어져버렸다. 플레하노프는 양측을 화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분열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것이 제2차 당대회에서의 역사적인 분열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이후 사실상 2개의 당으로 분열되고 말았으며 멘세비키는 10월혁명 후 반혁명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레닌은 당대회가 끝난 다음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장문의 팜플렛을 발간하여 제2차 당대회의 경과를 밝히고 볼세비키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분파를 결성하는데 성공했을 뿐 사회민주당의 통합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이때 ‘피의 일요일’이 일어났고 1905년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1905년 4월(런던), 1906년 4월 (스톡홀름), 1907년 2〜5월(런던), 1912년 1월(프라하) 등 수차례의 당 대회가 열렸지만 양파는 단결하지 못하고 극심한 분파투쟁을 벌인다.
한편 1905년 혁명을 진압한 후 짜르체제의 구세주로 등장한 스톨리핀이 혁명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동시에 상당한 폭의 개혁정치 를 실시함으로써 국내에서는 혁명의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이른바 ‘현장 군법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체포 즉시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테러의 희생자가 장례식을 마치고 땅에 묻히기 전에 테러리스트의 체포와 재판, 처형, 매장이 모두 끝나도록 조처한 것이다. “러시아는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해야 해 ! ” 자신의 모토대로 스톨리핀은 황실과 정부에 붙어 기생하는 부패분자와 깡패 같은 세력도 과감하게 쓸어냈다.
그는 마치 레닌의 저서 "러시아 자본 주의의 발전"을 연구하기라도 한 듯이 농촌의 자본주의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1861년 농노해방령은 농촌공동체인 미르(mir)를 그대로 유지시킨 가운데 토지를 나누어주었으므로 미르는 토지보상금에 대한 집단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르는 인구 변동이 있을 때마다 땅을 회수하여 재분할을 했다.
스톨리핀은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농민들이 유럽의 농민들처럼 보수적으로 되지 않고 집산주의적(集産 主義的)이념에 쉽게 젖어든다고 생각했다. “집산주의적 원칙에 대한 자연스러운 견제는 개인 소유의 원칙이다. 소규모의 소유자는 국가에 있어서 모든 안정된 질서가 의존할 수 있는 핵심이다”
스톨리핀은 자 기의 소신에 따라 농민들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고 미르에서 탈퇴하여 경작지의 소유자가 되도록 장려하는 토지법과 농지자금 대여법을 제정했다. 레닌은 이것을 ‘건전한 반동정치’라고 평가했다. 또한 스톨리핀은 두마<의회)를 해산시켰다. 저11대 두마를 보이콧한 좌익정당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제2대 두마에 대거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법을 고쳐 농민의 투표를 절반으로, 노동자의 투표를 3분의 1로 죽여버림으로써 제3대 두마에서 좌익세력이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사회주의자들 가운데는 두마 보이콧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레닌은 “만일 필요하다면 돼지우리 속에서라도” 혁명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1년 9월 14일 스틀리핀은 키에프의 한 극장에서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한 암살자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레닌은 당내 투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하당을 해소하고 합법 의회를 중심으로 싸워나가자는 우경적 ‘청산주의’와 민중을 기만하는 두마에서 사회민주당 대표부를 탈퇴시키자는 좌경적 ‘소환주의’에 대해 그는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또한 레닌은 농민의 혁명성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기 시 작했다. 멘세비키든 볼세비키든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농민들이 후진적이며 재산에 집착하는 소(小)소유계급이므로 혁명의 추진세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현실적으로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짜르체제에 반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농민의 협력을 얻지 못하는 한 러시아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더우기 그의 마음속에는 옛 나로드 니키 투사들의 농민애적(農民愛的) 전통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멘 세비키는 1905년 혁명에서 무기를 든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평가했으나 그는 오히려 좀더 단호하게 무기를 들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무장봉기의 전략전술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당내에 군사 기술을 다루는 사조직을 은밀히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멘세비키 측에서 레닌을 폭력단체의 배후로 몰아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불지옥이 러시아를 덮쳤다. 제정러시아는 안팎으로 겹친 우환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과의 전쟁이 국민적 대단결의 계기가 되었다. 짜르의 동원령이 내리자 백만명의 징병 대상자들이 기꺼이 총을 들었다. 그러나 막강한 독일군은 원수 힌덴부르크와 총참모장 루덴돌프의 지휘 아래 오합지졸 같은 러시아군을 무참히 유린했다.
개전 1년 만에 러시아군은 15만이 전사하고 70만이 부상당했으며 90여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서부 공업지대를 포기하고 퇴각한 탓으로 경제는 엉망이 되고 물가는 매년 배로 올랐다. 더구나 노동자의 임금은 더 내려가 파업은 한 해에 수만 건씩 발발했다. 사무직 노동자와 소상인들 역시 생활고에 시달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겨울이 가고 봄이 와서 ‘어머니 러시아’의 대지는 애타게 손짓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들판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늙은 농부들은 퇴락한 집안의 마당에서 전쟁을 원망했다. 이것이 밖에서 덮쳐온 우환,즉 전쟁의 국내적인 결과였다.
안으로 ‘건전한 반동정치가’ 스톨리핀이 사라져버린 러시아 황실은 시베리아에서 온 괴승 라스푸친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었다. 니콜라스2세는 힘과 무자비함과 현명함을 요구하는 짜르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다. 더우기 그는 독일 공주였던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꽉 쥐어살다시피 했다. 그녀는 오만하고 고집이세며 허영심이 강한 여성으로서 신비주의에 광적으로 매달렸다.
또 선악에 대한 관념이 부족해서 자기의 비위를 맞추기만 하면 그것이 악이라도 환영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이라도 배척했다. 그녀는 황태자 를 낳기 위해 마술사, 돌팔이 의사,사기꾼들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그 덕분인지 황태자를 낳긴 했는데 이 황태자 알렉시스가 공교롭게도 혈 우병 환자였다. 그렀데 우연인지 아니면 어떤 신비로운 능력이 있어서인지 라스푸친이 기도를 하면 혈우병의 고통이 덜어졌다.
황후는 모든 희망을 라스푸친에게 집중시켰고 연모와 같은 감정으로 대했다. 라스푸친은 궁정을 주름잡으며 별별 음탕한 짓을 다하고 돌아다녔다. 그가 황후와 동침한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러시아가 독일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중놈 손에 망하겠구나”는 탄식이 도처에서 나왔다.
그러나 황후는 그런 이야기를 절대로 믿지 않았다. 라스푸친이 벌인 술 난장판이 경찰의 개입을 불러들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라 스푸친은 항상 비난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옛 성자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받고 박해받는 사람이었다. 보다 못한 총사령관 니콜라스 대공이 라스푸친을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이를 눈치챈 라스푸친은 황후를 움직여 그를 해임시켰다.
전쟁상(戰爭相) 폴리바노프와 외상 사조노프도 해임되었다. 1916년 9월 니콜라스2세는 직접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아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전제주의적 이면서도 무능하고 게으른 지배자였다. 알렉산드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는 불편스러워했다.
그는 장관들이 유능할수록 그들에 대해 화를 냈다. 그가 전장에 있으면서 주고받은 편지들은 날씨와 생활 주변,가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한 마디로 ‘골빈 황제’였던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우리의 친구가 밤에 계시를 받았는데,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해 야 한답니다”하는 식의 작전지시를 내렸고,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 만 황제는 이에 따랐다.
라스푸친을 처형하고 독일 여자인 황후를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고 시위가 벌이지기도 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태후, 즉 알렉산더3세의 황후요 니콜라스2세의 어머니가 전선의 아들을 찾아가 설복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6년 말 몇몇 귀족이 라스푸친 암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라스푸친을 초대하여 독약이 든 과자와 술을 먹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는커녕 오히려 기타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흥겹게 마시며 노래부르는 진풍경이 2시간 반이나 계속 되었다. 견디다 못한 암살자들은 총을 쏴서 라스푸친을 죽인 후 네바강의 얼음 아래 집어넣어버렸다. 사흘 뒤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당국은 ‘엄격한 검시’를 한 후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로 발표했다.
어쨌든 이 전설적인 사나이는 죽기 전 황제에게 1년 안에 실현될 신비로운 예언적 편지를 남겼다.
나는 내년 1월 1일 이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일반 백성의 암살자,특히 나의 형제인 러시아 농민에게 살해된다면,짜르인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옥좌에서 통치할 것이며 아이들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다면,그들의 손은 나의 피로 젖어 있을 것이며,25년 동안은 내 피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러시아를 떠나게 될겁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일 것이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미워할 것입니다. 25년간 이 나라에 귀족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사람이 당신과 친척이라면, 당신의 자녀와 친척들은 어느 누구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은 자본가들이 자기의 이익과 왕조의 야욕을 위해,비밀 외교•협정의 목적 수행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서로 쏴죽이게 만드는 짓”이라고 결의했던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하루아침에 ‘조국방위론자’가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레닌은 경악했다. 심지어 볼셰비키 조직 내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레닌은 낙담하지 않고 더더욱 강한 각오와 투지를 다졌다. 레닌은 시련을 겪을수록 강해지는 타입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곤경에서 빠져나와 스위스로 도망쳐온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깊이 연구한 끝에 1916년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187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가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단계를 지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제공해주며 또 그것으로 대량생산한 상품을 비싸게 팔 수 있는 해외식민지 를 둘러싼 쟁패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선진 공업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지체되어온 것은 그들이 해외의 식민지 민중을 착취해서 그 이윤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계급의 상층부를 매수함으로써 계급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전 세계 금융의 80%를 차지하는 영국•독일•프랑스•미국의 4개국과 식민지의 80%를 장악한 영국•독일•프랑스 3개국은 더더욱 넓은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되니까 마침내 일대 격투를 벌이게 되어 결국 하나의 국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파괴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선진 공업국가의 젖줄로서 그 나라의 계급투쟁을 완화시키는 식민지의 민족해방혁명이나 러시아와 같이 후진적이지만 식민지가 없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약한 고리’에서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더구나 그 혁명은 전쟁에 의해 촉진될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는 자기 조국이 패전하여 혁명이 촉진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비록 2월 혁명의 시기와 과정까지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일년후의 러시아혁명을 거의 그대로 예언한 셈이다.
1917년 첫 두 달 동안에 1천 3백 30건의 파업이 일어나 67만 6천 3백명이 참가했다. 식료품과 연료도 바닥이 났다. 수도에 남아 있는 비축 식량이 10일 분밖에 되지 않자 드디어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 장사진을 이루고 서서 한덩이의 빵을 기다리던 여인들이 최초의 행동을 개시했다.
배급품이 떨어진 것이다.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여인들은 빵가게와 식료품점을 습격했다. 이들은 주로 가난한 병사의 아내들과 여공들이었다. 다음날인 2월 23일, 사회주의자 단체들은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빵을 다오 ! ” “아이들이 굶고 있다!” 시위는 노동자 밀집구역으로 번져나갔다.
“짜르를 타도하자 ! ’’ 간간이 정치적 구호가 섞여나왔다. 이날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의 전 체 노동자의 절반인 20만명이 파업을 벌였다. 거의 모두가 “전제정치 타도 ! ”를 외쳤고 "라 마르세이에즈"를 부르며 적기를 혼들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도심으로 밀려들었다.
수도에 주둔하 고 있던 15만의 경찰과 군병력은 노동자들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시위대는 바로 병사들의 부모형제나 처자식이었기 때문이다.
2월 25일에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전차가 멈췄고 신문도 나오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는 완전히 군중에 포위되었다. 니콜라스2세는 “내일 현재로 거리의 모든 혼란을 정지시킬 것을 명령한다”는 전문을 날렸지만 병사와 파업노동자 사이의 연대와 결속이 있는 한 발포명령은 불가능했다.
밤이 되자 짜르의 비밀경찰은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지하운동 조직원들은 당 지도부로부터 아무 명령도 받지 못했고 합법 정당들은 간부들이 체포되어 기능이 마비되었다.
시위는 나흘째 계속되었다. 병사들은 군중들과 다정한 눈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장교들은 발포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은 공포를 쏘아댔다. 그 와중에서 1백 50명이 살상당했다. 마침내 '병사들은 총부리를 장교들에게로 돌렸다. 장교들은 달아났다. 시위군중은 환호성을 올렸다.
병사들은 무기를 나누어주었다. 힘을 낸 시위대는 법원 청사를 불태운 후 동궁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황제의 기를 내리고 붉은 깃발을 꽂았다. 1917년 2월 27일의 일이었 다. 그들은 다음날 프랑스대혁명 당시 파리의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듯 피터 .앤 폴 요새감옥을 점령했다. 내각은 총사퇴를 결정하고 황제에 새정부를 구성하라고 건의했다.
두마의 의원들 역시 대경실색했다. 총을 들고 몰려온 시위대는 “이제 우리가 무얼 했으면 좋겠소”라며 아우성쳤다. 36세의 엘리트 정치가인 케렌스키가 나서서 외쳤다.
“장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시오* 우체국과 전신전화국,철도역과 정부 청사를 점령하시오’’
두마는 상황에 밀려 임시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시위를 주도한 병사와 노동자들은 재빨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 행위원회’를 결성했다. 병사들은 1개 중대에서 1명, 노동자는 1천 명에 1명씩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 기구 역시 두마 청사 안에서 결성되었다. 이로써 “두 개의 서로 다른 러시아”가 나란히 태어났다.
모든 것을 잃은 지배계급의 러시아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권력을 향해 행진하는 노동자의 러시아가 나란히 자리잡은 것이다.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는 당장 이즈베스차뉴스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05년 혁명 시에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졌던 소비에트가 불사신처럼 부활한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사태를 오판한 니콜라스2세는 마지막 희극을 연출했다. 짐은 제위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노라. 오늘 세시까지는 아들 알렉시우스에게 양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결정을 바꾸어 동생 미카엘에게 양위하기로 했다. 짐은 그대들이 한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해주리라고 믿는다.
이 소식을 군중에게 읽어준 두마 의원은 밟혀죽을 뻔했다. 황제와 그 가족은 짜르스꼬예 셀로에 감금되었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우리는 레닌이 핀란드역에 도착하던 광경을 살펴보았다. 레닌은 독일 정부와의 협정하에 스위스의 취리히를 출발해서 독일 영토를 통과하여 귀국했다. 독일 정부는 레닌이 귀국하여 러시아 정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해주면 전쟁에서 유리하리라 판단하여 열차편을 주선한 것이다.
레닌이 돌아온 4월 3일은 2월혁명이 있은지 한 달 남짓한 때였다. 두마 내의 왕당파 의원들은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쟁 승리’를 암송하고 있었으며, 입헌민주당의 자유주의자들은 소비에트의 활동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썩은 문짝 같은 짜르정부”를 걷어차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를 장악한 멘세비키는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당연 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각각의 공장이나 부대에서는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와 병사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했지만 그들은 아직 하나의 조직, 하나의 힘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있었다. 막 글을 깨우친 노동자와 병사들은 읽을거리에 목이 말라 있었다.
러시아 전체가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신문, 팜플렛 전단 등 읽을거리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그러나 눈앞을 밝혀주는 글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바로 그들 앞에 레닌이,“톱니바퀴처럼 정확하기로 이름난,’ 볼세비키의 지도자 레닌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회주의혁명 만세 ! ”라는 외침으로 민중의 요구에 대답했다.
레닌은 다음날인 4월 4일,그 유명한 「4월 테제」 를 발표했다. 이 테제에서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라고 외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그 대신 볼세비키의 영향력을 확대하자고 주장 했다. 투쟁의 목표는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국적으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다.
그는 또 지주의 재산과 토지의 몰수, 생산시설에 대한 노동자 소비에트의 통제를 주창하고 당의 이름을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 다. 그는 또한 멘세비키와의 통합에도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볼세비키 진영 내의 가장 충성스러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정파가「4월 테제」를 비난했다.
의기양양한 임시정부는 독일과의 전투에서 숭리하여 지지기반을 넓 힐 생각으로 갈리시아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이 대공세는 실패로 돌아가 오히려 독일군의 대반격을 초래했다. 군인들은 뿔뿔이 또는 집단적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후방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의 자금이 독일정부의 금고에서 나오고 있으며 레닌 은 독일의 첩자라는 비난을 퍼뜨리고 체포명령을 내렸다. 볼세비키는 고립되었고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망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5월에 귀국한 트로츠키가 그를 대신해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트로츠키는 ‘전쟁 반대’,‘임정 반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볼세비키의 전 술에 완전히 찬성하고 있었으므로 레닌 체포령에 항의하다가 투옥되 었다. 볼세비키는 그를 중앙위원에 선출했다. 그러나 ‘6월 공세’의 실 패로 인해 임시정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전쟁 반대” “모든 권력 을 소비에트로 ! ’’라는 볼세비키의 슬로건은 급속히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식량과 보급품이 떨어진 참호에서 끝모를 전쟁에 넌더리가 난 병사들은 이제 총검을 임시정부로 겨누려 하고 있었다. 10월에 열 릴 예정인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대외에 파견할 노동자와 병사 대
표를 뽑는 선거에서 볼세비키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대착오적 왕당파인 육군 참모총장 코르닐로프가 자기의 군대를 페 트로그라드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깜짝 놀란 케렌스키는 사회주 의자의 도움을 얻기 위해 트로츠키를 석방했다. 병사와 철도노동자들 이 동원을 거부하고 열차운행을 중지시켜 코르닐로프의 수도 진격을 저지했다.
다시 임정의 위신은 떨어지고 볼세비키의 지위는 을라갔다. 트로츠키 는 석 방되 자마자 페 트로그라드 소비 에트 의 장으로 선출되 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볼세비키가 장악한 공장 소비에트의 무장대인 적위대를 설립하는 한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의장으로 취임했다. 볼세비키는 모스크바 소비에트까지 장악 했다. ‘외로운 늑대’ 트로츠키가 1905년의 화려한 데뷔 이후 12년 만 에 다시 눈부신 활약을 시작했던 것이다.
레프 브론슈타인, 즉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 켈손에서 유태계 농민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은 볼세비키 혁명과 같은 1879년 10월 25일이었다. 그는 혹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뎃사에서 보낸 학생시절에 유럽의 사회상을 책을 통해 알게 되면서부터 러시아의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수학과 작문에 특히 뛰어난 학생이었다. 레프 는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그러했듯 나로드니키로서 혁명활동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그는 곧 ‘남(南)러시아노동자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했으며 경 찰에 체포되어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섯 살 연상인 마르크스 주의자 알렉산드라와 유형지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레닌의 저작에 매 료되어,유형지를 탈출,망명중인 레닌을 찾아가 운명적인 인연을 맺 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때때로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를 왔다갔다했지만 결 정적인 시기에는 언제나 거침없는 행동으로 레닌을 도왔다. 레닌이 케렌스키에게 쫓겨 핀란드로 가 있는 동안 10월혁명의 승리를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춘 것은 바로 그였으며, 귀족과 지주,사회혁명당 우파 와 멘세비키, 그리고 자본주의 열강의 군대에 맞서 내전을 승리로 이 끈 것도 바로 레프(사자라는 뜻)의 공이었다.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본부는 페트로그라드 시 외곽의 네바 강변에 있는 스몰니 학원에 있었다. 그곳은 구체제 아래 서 러시아 귀족의 딸들을 가르친 유명한 학교였다. 10월혁명 전야의 스몰니 학원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아래층 의 큰 홀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동자 병사 대표들이 몰려들어 5코페 이카짜리 식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농담을 떠들썩하게 주고받거 나 빈 마룻바닥에 뒤엉켜 잠을 잤다.
2충에는 버터를 두껍게 바른 빵 을 파는 제대로 된 식당과 대표 자격 심사위원회가 있었다. 제1차 전 러시아 대표 소비에트대회 중앙집행위원회는 멘세비키에 의해 장악되 어 있었으므로 2충의 자격 심사위원회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멘세비 키들이 ‘더럽고 무식한’ 아래충의 대표들을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 장과 병사 소비에트 대표 선거에서 볼세비키에게 참패했기 때문에 9 월에 열었어야 할 대회를 한 달이나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층에 모여든 소비에트 대표들은 그야말로 낡은 러시아의 밑바닥에서 권력 의 꼭대기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몰래 귀국한 레닌은 10월 21일, 볼세 비키 지도자들의 비밀회의를 소집했다. 이들은 소비에트대회인 10월 25일 새벽에 “권력을 장악”한 다음, 대회에서는 “그 권력으로‘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로 결정하고 수도 점령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작 성했다. 6월에 박해받고 쫓기던 볼세비키가 불과 넉 달 뒤에 국가권 력을 장악하기로 결정할 만큼 거대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 정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 결코 혼들릴 줄도 굽힐 줄도 모르고 끝끝내 관철시켜내고마는 철의 인간 레닌이 나로드니키로부터 시작되어 멘세비키에 이르는 숱한 내 부의 적과의 할투를 마감짓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 결정 이후 그때 까지 혁명 진영 내의 정파로 보이던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 입헌민주당 등 모든 세력이 혁명을 압살하기 위하여 외국 군대와 손잡 고 총을 들었다.
적위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10월 25일 새벽, 페트로그라드 시 가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이날 밤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대회는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레닌은 노동자 농민의 정부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인 없는 권력”을 그저 장악하는 데 성공했을 뿐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 수 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내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내전의 유 혈 속에서 현대의 초강대국 ‘소비에트 러시아’가 태어났다. 더불어 세 계는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의 적대하는 양대 진영으로 분열 되었다. 니콜라스2세의 일가족은 1918년 7월,에카테린부르크 억류지 의 한 지하실에서 참혹하게 사살되었다. 라스푸친의 신비로운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1924년 1월 레닌이 뇌일혈로 사망했을 때 그의 아내 크루프스카야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지 여러분! 요새 며칠 동안 내가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관 옆에 서 서 그의 일생을 다시 한번 회상할 기회를 얻었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전체 노동자,전체 피억압 계급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은 이런 말을 한번도 한 일이 없고, 나 역 시 그랬읍니다. 이와 같이 엄숙한 시간을 빌어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
레닌이 죽은 후 당내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혁명 승리에는 별반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일이 없는 스탈린이었다. 그는 무자비한 ‘프 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혁명정권을 공고히했다. ‘젊은 독수리’, ‘외로 운 늑대’ 트로츠키는 해외로 망명하여 전전하다가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됨으로써 풍운아의 일생을 마 감했다.
볼세비키혁명은 인간사회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지향에 따라, 의식적으로 사회를 변혁한 최초의 혁명이다. 더욱이 그것은 한두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수십만 수백만의 인간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역사이다. 그것은 사회가 더이상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해한 존재가 아니라,인간의 의식으로 분석하여 발전의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의 집단적인 힘으로 변혁 할 수 있는 대상임을 입증한 혁명이다.
동시에 그것은 20세기의 모든 혁명에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하였으며 그 혁명들의 성격과 진행과정과 혁명 주체의 의식을 사회주의적인 요소로 많든 적든 물들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세계사를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힘은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의 적대적 모순 대립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같은 혁명에서조차 뛰어난 개인의 인격적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레닌은 입증했다. 레닌이 없는 러시아혁명은 생각할 수 없고 러시아혁명 속에서가 아니면 레닌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 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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