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세계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일찌기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체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양분시킨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것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 그것은 소용돌이치는 혁명과 전쟁의 피비린내 한가운데서 태어났다.
혁명과 전쟁의 20세기,그 서막이 열린 것은 1905년 1월 제정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레닌그라드)에서였다.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이었다. 제정러시아의 짜르(황제) 니콜라스2세가 사는 동궁(冬宮) 앞에 약 20만 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여자와 노인, 어린아이들까지 많이 섞인 노동자들의 대열은 평화로왔다. 그들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 “하느님이시여 ! 짜르를 구해주소서”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자비로우신 아버지 짜르’에게 호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선두에서 대열을 이끈 사람은 러시아 정교회의 가퐁 신부였다.
그는 저임금을 견디지 못해 파업을 일으키려 하는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들의 소박한 바램을 ‘아버지 짜르’ 에게 직접 호소해서 해결해주기 위해 대열을 이끄는 중이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
폐하. 저회 성(城)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들과 늙은 부모들은 진리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서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가 되었으며,억눌려 살았으며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
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계속해서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사옵니다...저희 가 요구하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여달라는 것, 일당을 최소한 1루블만 달라는 것, 규정시간 외의 노동을 없애달라는 것이 고작이나이다. ......
저희들은 여기에서 마지막 구원을 바라고 있사오니 신민들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면...... 폐하의 이름을 우리들의 가슴과 우리들 후손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기게 될 것 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답해주시지 않는다면, 저회들은 폐하의 궁전 앞 이 광장에서 죽을 것입니다.
길가던 구경꾼들은 이 평화로운 대열과 황제의 초상을 보고 경건한 찬송가를 들으면서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경찰은 그들을 위해 교통 정리를 해주었다.
그러나 동궁의 광장에서 그들을 맞아준 것은 황제가 아니라 무장한 군대와 경찰의 바리케이드와 행진 중지명령이었다. 그러나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노동자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의 자비로운 음성 대신 무자비한 총성이 광장 일대를 뒤덮었다. 광장의 횐 눈 위에 가난한 노동자들의 피가 뿌려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궁 안에 2만 명의 무장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호기심이 발동된 구경꾼과 발포 소식에 격분한 학생들이 동궁 앞으로 모여든 것이다.
이들은 군대와 경찰의 야만적 행동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다. 다시 발포와 유혈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발포로 이날 5백 명 이상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확실한 집계는 없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 이라는 이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닐 만큼의 충분한 피가 홀렸음에는 분명하다.
짜르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무도한 압제자임이 만인의 눈앞에 드러났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비로운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자기의 고통을 호소하러 왔다가 자비 대신 총탄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의 민중은 짜르에 대한 동화 같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날의 총소리와 유혈 한가운데서 짜르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한톨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러시아의 민중은 그 순간 암흑의 중세에서 뛰쳐나와 현대 혁명의 주역으로 돌변하였다. 수십 년 동안 지하의 혁명가들이 선동해온 “짜르 타도 ! ”의 구호를 그들은 비로소 마음으로 접수하였다.
얼어붙은 한겨울의 페테르스부르크,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가 머무는 성스러운 도시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만들어지고 수천 년 억눌려온 대중의 울분과 저항이 일시에 폭발하여 얼어붙은 동토 러시아의 대지 위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가퐁 신부는 해외로 달아났다. 그는 짜르에게 일체의 존칭을 생략한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의 민중 사이에 영원히 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 적인 결속은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흘러야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에게 홀러 떨어지리라.
한편 짜르 니콜라스2세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무능한 황제는 사태의 원인과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들어오려 했을 때, 성 페테르스부르 크에서는 중대한 무질서 사태가 발생했다. 여러 곳에서 군대는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대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그리고 혁명의 불길이 여기서부터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어느날 우연히 생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전제정치의 대국 러시아의 대지 위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폭발을 준비하는 증오의 화약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이 그 화약더미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19세기 초반의 제정러시아 사회는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가 수립되고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산업발전을 이룩한 서유럽에 비해 현저 히 뒤떨어져 있었다.
당시 3천백만의 인구 가운데 2천만명 이상이 ‘사람보다는 오히려 짐승에 가까운’ 비참한 생활을 하는 농노였다. 그들은 귀족에게서 집과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지은 후 그 댓가로 돈과 농산물을 바치거나, 땅이 없이 귀족의 집에 살면서 그 집안의 온갖 일을 다 하는 종으로서 생명을 유지해야 했다.
제정러시아는 바로 이 같은 농노제도 위에서 있었으며 짜르의 힘과 권위는 가히 하느님에 비길 만큼 절대적이었다. 귀족들은 짜르의 보호를 받으면서 농노들이 피땀 홀려 만든 생산물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먹고 마시고 치장 하고 연애하는데만 정신을쏟 았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귀족들의 연애 이야기나 화려한 사교계의 모습은 국민의 대다수인 농노에 대한 잔혹한 착취를 거름삼아 피어난 부패와 낭비의 꽃송이였다.
그들은 유럽의 문화를 흉내내는 것으로 교양을 과시했는데 심지어 프랑스어를 상용어로 쓸 정도였다. 농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말하는 짐 승”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문학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투르게네프나 푸쉬킨,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농노들의 생활이 다루어진 것은 드문 예외였을 뿐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산업은 중세 그대로였고 정치 사회적 발전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같이 완고한 짜르체제에 대하여 최초의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으로 출정했다가 자유로운 사회를 경험한 일군의 청년장교들이었다.
유럽에 홀러넘치던 자유주의 사상이 제정 러시아의 두터운 얼음을 뚫지 못하여,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유럽의 자유사상을 맛보고 있었을 뿐이던 이 나라에 그들은 한때의 제비처럼 철이른 봄소식을 물고 날아들었다.
짜르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러시아 민중을 그 굴레에서 해방시키려고 마음먹은 청년장교들은 몇몇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얼마뒤 알렉산드르1세의 뒤를 이어 니콜라스1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는 날에 이들은 3천여 명의 반란군을 모아 짜르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이른바 데카브리스트(러시아력 ‘12월’) 당원의 반란이다. 그러나 이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포위공격당하여 사살되거나 처형되었다. 모여든 구경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반란군에게 보드카와 빵을 가 져다주며 호응했지만 그들은 민중의 힘을 규합할 필요성과 방법을 깨 닫지 못한 채 죽어갔다.
반란은 곧 진압되어 철이른 제비들은 러시아의 동토 위에서 마침내 얼어죽고 말았다.
즉위 첫날에 반란을 경험한 니콜라스1세는 혁명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혀 이후 30년의 재위기간 동안 극도의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은 동토 러시아에도 어김없이 스며들어 서구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지식인 집단을 형성시켰다. 가난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농노들은 해마다 각지에서 수십회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알렉산드르2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그는 국내정치의 개혁과 근대화를 약속했다. 농노를 해방시키 고(1861) 지방자치기구인 젬스트보 의회를 신설하는 한편(1864), 사법 제도를 개혁하고 계급의 차별이 없는 징병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해방자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명목상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거나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은 해방 이전이나 다름없이 가난하고 비참했다. 하지만 이같은 농노 해방은 러시아에 자본주의적 근대산업이 발전할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자본을,다른 한편으로는 “팔 것 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를 필수조건으로 한다. 바야흐로 ‘토지와 신분제도로부터 해방된’ 농민들은 임금노동자로 변신할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1881년, 알렉산드르2세가 한 테러리스트의 폭탄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개혁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 뒤로는 알렉산드르3세와 니콜라스2세의,시대를 역행하는 반동정치가 계속되었다.
언론•출판•집 회•결사의 자유가 금지되었고 지식인은 박해받았다. 대학 자치권이 박탈되어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들어갔고 지방자치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오로지 짜르의 권한만이 날로 강화되었을 뿐이다.
이같은 정치적 후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산업은 알렉산드르2세 의 개혁정치 이후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1880년대와 90년대에 걸 쳐 공업 생산이 두 배로 증가했고 공장노동자의 수도 급증했다.
시베 리아 횡단 철도가 건설되고 큰 공장들이 앞다투어 생겨났다. 해방된 농노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의 공장으로 끊임없이 홀러들었다.
특히 대공장에 집결된 노동자들은 향후 러시아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 산업발전이 훨씬 앞선 독일에서 전체 노동자의 상당수가 대공장에서 일한데 비해 러시아의 노동자는 무려 34%만 그러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처지는 농노와 별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하면서 더럽고 비좁은 방에서 남녀노소가 한덩어리로 뒤엉켜 자고 먹었다. 장티푸스와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과 직업병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자본가들은 마음내킬 때 주고 싶은 만큼 제멋대로 임금을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절망적인 저항의 수단으로 스트라이크와 폭동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만사를 잊어버리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편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들 역시 한가지였다. 소수의 농민들은 재산을 모아 부농으로 성장했지만 대다수의 빈농들은 과 거와 다름없이 살아야만 했다.
그들은 소나 말처럼 일하면서 가축과 한방에서 먹고 자고 아이를 낳았다. 앉아서 굶어죽을 지경에 이를 경우 이들은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을 택하여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지주의 집을 불태우고 지주를 살해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언제나 짜르의 군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한편 주로 농민의 아들인 병사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귀족 장교들의 인격적 멸시와 형편없 는 처우에 대항하여 가슴속에 반역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사회의 깊은 곳에서 짜르체제를 타파하려는 세 가지의 정치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그 첫째가 나로드니 (narodniki, 인민주의자)였다. “농민은 타고난 무정부주의자이므로 농민의 혁명적 에너지를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불꽃만 있으면 된다.
청년들이 농촌에 뛰어들어가 그 불꽃을 던지라! ”는 혁명가 바쿠닌의 주장대로 들은 1800년대 후반에 농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유재산 때문에 사회의 모순이 생긴다며 사유재산 폐지의 필요성을 가르쳤지만 가난한 농민들의 소망은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재산을 늘리는가 하는 데 있었다. 무지하고 완고한 농민들은 나로드니키를 경찰에 넘기거나 돌팔매로 쫓아버렸다.
이리하여 무한한 정열과 헌신으로 끓어넘치던 청년 지식인들의 ‘브나로드’(인민 속으로)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농민의 ‘혁명적 에너지’를 폭발시키는데 실패한 나로드 니키의 일파는 다음에는 폭력에 의해 짜르니즘을 타도하는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은 수많은 비밀결사와 지하조직을 만들어 짜르 정부의 요인을 암살했다.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사회혁명당을 만들었다.
두번째의 세력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는 플레하노프(Plekhanov)를 스숭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론을 받아들여 공장노동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898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결성했으나 아직 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들 은 노동자계급을 주체로 한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농민에 의거하여 혁명을 일으키려는 나로드니키를 경멸하고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짜르 경찰은 골치덩어리 나로드니키를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이 합법 적으로 출판되자 청년 지식인들은 급속하게 나로드니키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의 편으로 넘어왔다. 짜르 경찰은 가장 위험한 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번째의 세력은 이같은 혁명세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전제정치 대신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온건 개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주로 신홍 자본가와 비교적 개명한 귀족과 지주들이었으며 대부분의 귀족과 지주들은 여전히 전제정치를 칭송하는 형편이었다.
이 세 정치세력은 하나같이 대중을 사로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장 짜르체제를 타도할 힘이 없었다. ‘피의 일요일’은 바로 이처럼 비참한 러시아 민중의 처지와 그로 인한 절망적 저항, 그리고 여러 정치세력의 활동이 어우러진 가운데 일어났다.
그러면 그날 20만의 노동자를 이끌고 동궁으로 행진한 가풍 신부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어느 진영에 속한 인물인가? 그는 어느 진영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당시 32세의 젊은 신부로서 뛰어난 미남자에 지성적이고 정력적인 웅변가이기도 했다.
그는 톨스토이에 심취한 휴머니스트로서 노동자들을 교회의 정신적 영향력 아래서 순화시켜보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가풍은 개혁주의자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경찰 사회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의 선동에 감염되어 짜르에 저항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짜르 경찰이 이것을 고안해냈다.
수많은 경찰 스파이들이 노동자들속에 잠입하여 노동운동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동분서주했다.
가풍 신부는 경찰보다는 “신의 은총을 받는 교회”가 이 일에 적합하 다는 판단을 내리고 열심히 치안당국자를 설득했다.
치안당국의 허가 를 비밀리에 받은 그는 합법적인 사업을 통해 노동자를 불러보았다. ‘한가한 시간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보내기’,‘도박 없애기’, ‘술주정 뱅이 없애기’, ‘종교적 애국적 사상의 주입’, ‘노동조건과 노동자 생활에 있어서 합법적 개선을 위한 조직된 활동’등을 목표로 그가 만든 ‘러시아 공장노동자동맹’은 큰 성공을 거두어 페테르스부르크의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용주와의 싸움을 하면서 “하느님이시여 ! 짜르를 구해주소서”라고 노래부르게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가풍은 경찰의 스파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1904년 12월 어느날,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기관차 공장의 노동자들이 가퐁 신부의 지도 아래 회사에 대한 소박한 요구안을 만들어 사장에게 제출했는데 사장은 오히려 이들을 해고시켜버렸다.
그러자 노동자들 은 파업을 벌이면서 가풍 신부에게 자신들을 ‘자비로우신 아버지 짜르’에게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고민 끝에 이 부탁을 받아들인 후 짜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자비를 구했다.
이것이 사건의 시발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은 이 계획 을 반대하고 비웃었다.
“압제자에게 자비를 구하러 가다니 ! 그것은 마치 적에게 승리를 구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짜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동화 같은 환상을 깨뜨려 그들에게 무기를 들게 할 만한 힘이 없었다. 대중이 원했기 때문에 이 혁명가들 은 어쩔 수 없이 대열 속에 끼어 행진했다.
이리하여 기관차 공장의 조그만 노사분규는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상당하는 일대 참극으로 비화된 것이다.
혁명가들은 격분한 대중을 이끌고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짜르 군대에 대항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즈음 해외로 달아난 가풍 신부는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로 세계 매스컴의 촛점이 되었다.
그는 국제적 명성에 걸맞게 레닌을 위시한 수많은 망명 혁명가를 만나 무장봉기로 짜르를 타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총포를 구입하여 러시아에 반입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자 한동안 낙심하여 도피생활을 하다가 국내 로 잠입하여 다시 경찰과 손잡았다.
그러나 그는 1906년 4월, 작은 시골의 어느집 서까래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열혈 사회혁명당 당원들이 이 배반자를 처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동 신부의 젊은 생애는 끝났다. 그는 ‘피의 일요일’ 사건에 등장하는 유일한 희극배우일 것이다.
그러나 가풍 신부야 어찌 되었든 ‘피의 일요일’ 이후 1년간 러시아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특히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대제국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1905년 3월 일본 해군에 의해 전멸당함으로써 전제정부의 위신은 더더욱 땅에 떨어졌다.
전쟁과 혁명은 쌍생아이다. 보불전쟁 패배 직후 18기년 파리콤뮨이 일어났고 중일'전쟁의 잿더미에서 중국 혁명이 완수되었듯 패전으로 인한 정부의 권위 실추는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법이다.
이제 온건한 자유주의자로부터 혁명적 마르 크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세력이 공공연하게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하에 숨어 있던 여러 조직들이 봉기와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1905년의 혁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공장노동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야말로 짜르 정부의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현실로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적인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인 동시에 투쟁의 가장 용감무쌍한 선봉부대였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 때에 그 지도자들은 대부분 유럽에 망명해 있었다.
그들은 짜르 경찰의 탄압을 피해, 혹은 시베리아의 유배지를 탈출 해서 망명한 것이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던 지도자들은 그곳에서 혁명의 사상과 이론과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소책자로 만들어 국내로 몰래 반입하면서 국내의 지하조직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국내의 혁명 소식을 전해 듣고 홍분하고 감격했다. 1898년에 결성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경찰의 탄압으로 무너졌지만 이들은 국외에서 당을 재건했다. 그러나 당내의 이론투쟁 때문에 당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멘세비키와 볼세비키가 그것이다.
마르토프등의 멘세비키(Mensheviki, 소수파)는 다가을 혁명이 부르조아( 자본가계급) 민주주의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할 힘과 지식을 축적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 즉 노동자 계급)의 임무는 짜르 정부와 싸우고,짜르와 싸우는 부르조아지를 지지하면서 그 댓가로 노동자계급을 위한 최대한의 자유를 약속받는 것 이었다.
이들은 그와 같은 정치적 자유속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전파 하고 노동자계급을 조직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려고 했다.
반면 레닌을 지도자로 한 볼세비키(Volsheviki, 다수파)는 러시아의 민주주의혁명을 이룩할 주체는 노동자계급과 농민이며 노동자계급이 즉각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의 주도권을 부르조아 에게 맡긴다는 것은 또다른 소수자의 독재를 의미했다. 레닌은 짜리즘을 타도하고 수립하는 임시정부가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여야 하고 노동자계급은 그 속에 자기 몫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세비키는 이것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압도적 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말했다.
멘세비키와 볼세비키는 사실상 서로 다른 두 개의 당인 셈이었다. 볼세비키는 4월에 런던에서 제3차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회를 열었지만 멘세비키는 이를 비난했다.
트로츠키는 사상투쟁이 치열한 2당 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정으로 끓어넘치는 이 천부적인 혁명가는 가장 먼저 러시아로 귀국한다.
그는 각종의 노동자 집회에 참가하여 짜리즘 타도와 임시혁명정부 수립을 선동했다. 그의 불같 은 웅변과 빼어난 선동문서는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26세의 트로츠키는 페테르스부르크 혁명운동의 총아로 각광받았다. 레닌도 뒤늦게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했다.
러시아의 정치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였다. 메이 데이(MayDay, 5월 1 일 세계노동자의 날)에는 각지의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를 벌이며 경찰 및 군대와 유혈 충돌을 벌였다. 6월에는 오뎃사항에 정박중이던 혹해 함대의 전함 포템킨호의 해병들이 차별대우와 형편없는 급식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7월에도 곳곳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10월에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총파업을 단행함으로써 철도 운행이 전면 중단되고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어졌다.
정치적 자유와 빵을 요구하는 민중의 함성이 러시아 전역을 뒤혼들었다. 그리고 이 10월 총파업 과정에서 페테르스부르크의 공장노동자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표회의인 소비에트(평의회)를 창조 해냈다.
노동자들은 백명에 1명씩 대의원을 선출했는데 멘세비키가 소비에트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의 부의장으로, 그리고 뒤에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파업은 전 산업을 마비시켰다. 러시아의 지평선에서는 공장의 연기가 사라져버렸다. 신문•방송마저 끊긴 페테르스부르크의 밤은 암혹에 묻혔다. 소비에트는 스스로이즈베스차Klzvestia, 뉴스)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들 스스로 만들어낸 민주적 의회요 집행기관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실질적인 정부였던 것이다. 이것은 후일의 1917년 10월혁명에서 혁명의 권력기관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지금 소련의 정치체제가 바로 이 소비에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같은 총파업으로 짜르정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마침내 니콜라스2세는 굴복했다. 이른바 ‘10월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입헌군주제의 채택을 승인하고 신앙•사상•언론•출판•잡회의 자유, 참정권과 의회 설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일 뿐 곧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이즈베스차」에서 펜을 휘둘렀다.
헌법은 주어졌다. 집회의 자유도 주어졌다. 그러나 집회는 군대에 포위되고 있다.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러나 검열은 전과 한가지로 존 재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주어졌다.
그러나 감옥은 투옥된 사람들 로 넘쳐흐르고 있다. ......헌법이 주어졌다. 그러나 전제체제는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주어졌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젊은 트로츠키는 이같은 교착상태에서 감동적인 연설과 빛나는 글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을 움직였다. 그는 실질적으로 소비에트를 이끌었다. 그러나 레닌은 냉정하게 조직을 정비했다.
이 대조 적인 두 혁명가는 각자 자기의 일에 몰두했다. 트로츠키는 무대를 찾아다녔으며 레닌은 일을 할 수 있는 알맞은 직책을 원했다.
트로츠키는 추종자를 모았으며 레닌은 성실하고 복종적인 집행부를 원했다. 당은 트로츠키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외로운 늑대였다. 스스로 한 조직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혀와 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면 어느 단체든 자신에게 복속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은 다른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볼세비키의 지배권을 확립하는데 골몰했다. 1905년은 트로츠키의 해였다.
‘10월선언’은 속임수였다. 그것은 온건파를 파업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자들도 숭리의 환상에 젖어들었다. 트로츠키는 수만 군중 앞에서 ‘10월선언’의 기만성을 폭로하였으나 파업의 열기는 급속히 식어갔다. 파업만으로는 짜르를 타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파업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해 배가 고팠다.
소비에트는 할 수 없이 파업을 중지하고 ‘10월선언’이 약속한 내용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정치범의 사면 석방, 출판의 자유와 신문 검열의 폐지, 8시간 노동제 등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부는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특공대를 만들어 노동자를 습격했다. 이에 맞선 노동자들도 닥치는 대로 무장을 했다. 위기가 고조 되는 가운데 소비에트는 다시 파업을 결의했고 짜르 정부는 소비에트 간부들을 체포했다. 노동자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군대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습격했다.
마지막 의장 트로츠키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시베리아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지도자들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모스크바의 총파업 역시 무참히 분쇄되었다. 여기서는 군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천명 이상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마침내 ‘피의 일요일’에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이 대참사로 막을 내렸다.
“경험은 바보의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험에서 조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바보 이하의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는 무수히 발견된다. 니콜라스2세와 제정러시아의 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 지배계급으로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인해서 ‘피의 일요일’과 연인원 백만이 참여한 1905년의 대파업을 그저 다시는 없어야 할 끔찍한 사건으로만 보아넘기고 그 원인에 대해 서는 눈을 감았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짜르’’에게 구원을 호소하러 갔다가 자비 대신 피와 죽음을 맛본 러시아의 민중은 다시는 “하느님 이시여 ! 짜르를 구해주소서”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짜르 타도 ! 임시혁명정부 수립’’이라는 슬로건은 더이상 소수 혁명가의 선동구호가 아니라 민중의 절절한 소망으로 자리잡았다.
다시 국외로 나간 혁명 지도자들은 실패의 원인을 되돌아보고 승리에 이르는 방법 을 연구하며 조직을 더욱 튼튼히 꾸렸다. 그러나 짜르 정부는 ‘10월선언’을 완벽하게 배반했다.
1905년의 격동이 가라앉자 짜르는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혁명정당들이 연이어 압승을 거두자 그는 의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1906년 수상이 된 스톨리핀은 그 악명높은 반동정치를 실시하여 집권 5년 동안 4천여 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수만명을 시베리아로 쫓아보냈다.
러시아 민중은 교수대를 일컬어 ‘스톨리핀의 넥타이’ 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국은 다소 안정을 유지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1911년 한 테러리스트가 스톨리핀의 생명을 빼앗았다.
다시 노동자의 파업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소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지옥불이 러시아를 덮쳤다.
그리고 전쟁이 한참 불을 뿜던 1917년 10월 볼세비키혁명으로 니콜라스2세는 종 말을 맞이한다. 10월혁명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터이 지만 짜르체제는 실로 썩은 문짝처럼 쓰러졌다.
가퐁 신부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저주는 실현되었다. 동궁의 눈덮인 광장을 적셨던 노동자의 피는 결국 짜르와 그 처자식 들에게 홀러떨어진 것이다. '피의 일요일’ 이전만 해도 민중은 ‘아버지 짜르’를 존경했고 혁명세력의 힘은 미약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니콜라스2세가 그들의 호소에 귀기울이고 실질적인 개혁조치를 취했더라면,비록 전제정치가 유지될 수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잡학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월혁명 레닌 - 인간은 마침내 사회역사를 정복하다 (0) | 2022.07.20 |
---|---|
사라예보사건 - 읽기 쉬운 정리 (세계를 불사른 프린시프의 총탄) (0) | 2022.07.08 |
드레퓌스사건 - 알기쉽게 한방 정리 (0) | 2022.07.07 |
탈무드 책 내용 핵심 줄거리, 부자가 되려면 부자의 생각을 연구하라 (0) | 2021.10.10 |
부자가 되는 방법과 습관, 부자되기 위해 노력하라 (0) | 2021.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