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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사전

사라예보사건 - 읽기 쉬운 정리 (세계를 불사른 프린시프의 총탄)

by mammamia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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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의 수도 사라예보의 티없이 맑은 하늘 아래 몇발인가의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길 모퉁이를 돌던 호사한 승용차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그 안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나란히 쓰러졌다. 총을 쓴 사람은 열아홉 살의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시프(Gavrilo Princip)였고 쓰러진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황태자비 조세핀이었다. 프린시프는 즉각 체포되었으며 황태자 부차는 불과 15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것이 이른바 ‘사라예보사건’이다.

암살범 프린시프는 그 자신이 세르비아인이면서도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져야만 했던 병약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하얼빈에서 사살한 것과 똑같은 동기에 의해서 황태자 부차를 사살했다. 중세의 대제국 세르비아가 1989년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제국의 영예를 상실한 후 그의 조국 세르비아는 러시아와 터키, 오스트리아 등의 강대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전쟁이 끝난 1878년, 터키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세르비아인들이 독립을 성취하기는 했지만 보스니아 지역은 1908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로 병합되고 말았다. 따라서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에 대해 가슴 깊이 원한을 품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은 세르비아인의 민족주의는 청년 프린시프의 가슴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보스니아의 해방을 위해 몸바치기로 결심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제국의 영광과 야망을 한몸에 짊어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은 근처에서 열린 육군의 대규모 훈련을 참관하고 돌아가는 길에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의 아내 조세핀은 보헤미아의 백작의 딸로서 신분의 격이 낮아 수도 비인이나 공식적인 사교장에서는 정식 황태자비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따라서 외국인 황태자가 지배자의 위엄을 차리고서, 그것도 그런 황태자비와 함께 보스니아를 방문하는 데 대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분개했다. 프린시프는 이같은 분노와 원한을 실어 황태자 부차에게 총탄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엄청난 사태를 몰고올 것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단지 세르비아의 해방을 바라는 열망만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식민지의 재분할과 영토 확장을 노리며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세계의 열강들이 팽팽하게 맞서 있던 당시의 정세에서, 이 사건은 바싹 마른 들판에 던져진 불씨와 마찬가지였다. 이 운명의 날 이후 프린시프가 발사한 총탄은 세계를 불살랐고 거기서 피어난 포연과 유혈이 문명세계를 뒤 덮은 것이다.

황태자의 죽음은 오스트리아 황실에 전해졌다. 그러나 황실의 분위기는 냉담했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으로 인해 생전에도 냉대받은 황태자 부차의 장례식에는 황제도 황족도 참석하지 않았다. 남겨진 세 아이만이 왕궁의 구석진 방에서 부모의 죽음을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황실 밖에서는 유혈과 죽음을 예고하는 전쟁의 먹구름이 뒤덮이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발칸반도를 접점으로 하는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867년에 헝가리의 지주계급과 협정을 맺어 오스트리아 一 헝가리 제국을 탄생시킨 오스트리아는 중세 이래 동유럽을 지배해온 황실 합스부르크가(家)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유럽 각국의 슬라브계 민족들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凡)슬라브주의에 동조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편 황족의 암살에 본능적인 분노를 느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사라예보사건을 세르비아와 범슬라브주의자의 소행으로 간주한 오스트리아에 심정적으로 동조했다. 난처해진 나라는 제정러시아였다.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을 묵인할 경우 러시아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진해온 발칸반도로의 남진정책이 일대타격을 입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슬라브계 민족들에 대한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겠다는 오스트리아의 강경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세르비아의 뒤에는 러시아가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나섰다.

 

그리고 영국•러시아와 3국협상을 맺어 오랜 숙적인 독일제국을 견제하려 하면서, 또한 러시아에 엄청난 액수의 차관까지 제공해놓고 있었던 프랑스는 “세르비아는 러시아 국민의 친구이며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국”임을 암시하였다. 한편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경우 프랑스를 지원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음울한 전쟁의 악령이 유럽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세르비아에 초강경한 최후통첩을 띄워보내고 말았다. “세르비아내의 반(反)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협의회 및 암살 관련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의 참여”, “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의 파면”,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一헝가리 제국이 보낸 통첩을 온건하고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을 표명 했다. 세르비아는 일부분을 받아들이는 조건의 회신을 보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사라예보사건 한 달이 지난 1914년 7월 28일, 마침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문명의 대륙에는 바야흐로 야만의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대전란의 잔혹성에 대해서 정확히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오로지 대량살육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원된 이 전쟁은 모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참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가장 먼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러시아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로 부터 본격화한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스톨리핀의 반동정치로 잠시 숨을 죽였으나 1911년 이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경제적 처지의 개선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노동자들이 벌이는 대규모의 파업과 봉기, 농민반란, 짜르 타도를 외치는 공공연한 혁명운동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제정러시아 정부는 그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대외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거국적으로 무기를 드는 것 이외에 내란의 위험을 피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짜르 니콜라스2세는 국내의 적인 혁명세력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놀란 독일은 러시아를 향해, 12시간 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동원을 중지하지 않으면 전 육군을 동원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독일도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국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은 선전포고와 동시에 프랑스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고 군사 요새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 내각은 육군장관에게 총동원령 과 발포권을 부여했다. 독일군은 기다렸다는 듯 프랑스 국경을 넘어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동시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그러자 중립인 벨기에를 파괴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영국이 참전을 결정했다. 이제 세계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각국은 “조국을 수호 하자 ! ”라는 슬로건 아래 지원병 모집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각국 정부는 국민에게 참전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책자를 배포했다.

그러나 20세기 전쟁은 이미 단순한 정부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각성한 민중은 그것이 자신의 문제임을 알아차린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결집한 제2인터내셔널은 조만간 세계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고 이 전쟁이 식민지 쟁탈과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부르조아정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임을 선언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만일 전쟁이 벌어질 경우 각국의 노동자계급이 총궐기하여 이를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내전으로 전환하자고 결의했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발표되던 날, 파리, 빈, 런던, 베를린 등 곳곳에서 “평화 ! 평화 ! 전쟁 반대 !”를 외치는 시위행렬이 거리를 휩쓸었다. 7월 25일자 독일 사회민주당 기관지의 의 논설은 이같은 반전(反戰)운동을 가장 명료하게 대변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및 그의 부인이 한 청년이 쏜 총탄에 피를 홀렸기 때문에,바야흐로 수천 수만의 노동자 농민의 피가 흐르려 한다. 이 청 년의 행위가 더욱 광적인 범죄로 감싸이려 하는 것이다. 최후통첩은 그 말투나 요구조건이 너무나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 일지라도 자국민의 지탄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한,분명코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사태는 일변했다. “폭력적인 오스트리아의 야망을 위해 우리 독일군은 한방울의 피도 홀릴 수 없다”고 한 중앙위원회의 성명이 무색하게도 독일 사회민주당은 “4백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전시공채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은 ‘침략국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내던지고 ‘신성한 조국 방위’의 전선으로 달려갔다. 좌익 노동자당을 대표하는 케렌스키는 “위대한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공격해오는 적에 대하여 단호히 저항할 것을 확신 한다”고 열변을 토하여 의원들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았다. 오직 불법 화된 러시아 사회민주당만이 마르크스의 진정한 후예였다.

 

그들은 제 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를 비난하고 실제로 1917년에 내전을 일으켜 짜르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은 제2인터내셔널을 가장 먼저 공중분해시켜버렸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고 절규한 마르크스의 가르침에도 불구 하고 각국 노동자들은 ‘조국 방위’를 위해 총을 들고 맞섰다.

 

전쟁의 포연 속에서 인터내셔널리즘(intemationalism» 국제주의)은 사라지고 내셔널리즘(nationalism, 민족주의)만이 유럽을 사로잡았다. 합법적 활동으로 당세를 확장하고 있던 영국 노동당은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는 물론이요 열성적인 당원들마저 지원병 접수처로 스스로 달려가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각국 정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2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국민 앞에서 연설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당파가 사라지며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된다. 평화로운 시대에 온갖 당파가 나를 공격했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몰고온 대량학살을 최초로 보여준 격전은 프랑스의 세느강 지류인 마른강 일대에서 벌어진 ‘마른전투’였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 한 전투에서 러일전쟁을 통틀어 소모된 것과 맞먹는 양의 탄약을 서로에게 퍼부었다. 양국의 참모본부는 애초에 하루 2만 발의 포탄 사용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루 40만 발로도 모자라 허덕일 지경이었던 것이다.

 

동프로이센 발트해 연안의 ‘탄넨베르크전 투’에서 독일군은 1만2천 명, 러시아군은 그 열 배인 12만 명의 사상 자를 내는 엄청난 소모전을 치렀지만 전체적인 전황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동서부 양전선 모두 소모전에 지쳐 각국 군대는 교착상태의 참호전으로 돌입했다. 이처럼 방대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후방의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총력전 태세에 들어갔다. 현대 전쟁은 전선에서 군인들끼리 벌이는 예전의 전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점점 더 넓은 지역의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전쟁의 진흙구덩이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들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흑해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던 터키는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 한패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라비아반도에

도 거센 모랫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메카의 수호자’ 훗세인과 아들 파이잘을 비롯한 아리바아의 여러 왕자들이 사막의 유목민들을

불러모아 영국과 함께 터키군과 맞붙은 것이다.

 

오랫동안 터키의 지 배하에서 살아온 아라바아인들은 독립을 얻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게다가 영국은 독립을 미끼로 인도인들을 구슬렀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아고 있던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영국은 미국의 정계와 재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태인들을 움직여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외상 발포어(Balfour)를 워싱턴으로 파견했다.

 

이때 발포어는 장차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소위 ‘발포어선언’ 을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후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랑과 중동전쟁,또 팔레스타인 난민의 불행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필사적인 저항과 테러사태를 야기할 불씨가 만들어졌다.

아시아라고 해서 평화를 노래할 수는 없었다. 미국과 비밀조약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후 청(淸)과 러시아 두 대국을 상대로 전쟁까지 치르면서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관계를 명분삼아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다. 일본은 1914년 8월, 중국 청도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제도를 공격하여 독일 동양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독일이 누리던 이권을 대신 차지하였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일부에 눈독을 들이고서 1915년에 75만의 병력으로 연합국에 가담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독일 편에 가담했다. 그리고 중립을 지키던 루마니아는 자국의 영토 보존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연 합국 진영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독일•오스트리아•불가리아의 연합군에 의해 전 국토를 점령당하는 비극을 자초했다. 그리스는 불가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 측에 가 담했다.

한편 전쟁 불개입을 천명하고 ‘명예로운 고립’을 견지하고 있던 미국은 1915년 5월,독일 잠수함이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켜 그 배에 타고 있던 미국인 백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선언 하자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참전을 결정, 연합국에 대해 엄청난 규모의 물자 지원을 개시했다. 그야말로 5대양 6대주에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이 없는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뒤바꿔놓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만든 수 많은 변화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러시아혁명이다. 내란과 혁명을 모면하기 위해 서둘러 전쟁에 참가했던 제정러시아 정부는 바로 그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 무덤을 판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짜르체제의 무덤 위에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솟아났다.

 

교착상태에 빠진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의 참호전으로 허덕이던 제 정러시아는 식량과 생필품의 부족, 그리고 군수품 부족으로 인한 병사들의 반란과 더불어 그 새벽이 열렸다. “토지 !,빵 !,평화 ! ”를 요구하며 도처에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병사들은 장교를 사살하고 뿔뿔이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나 짜르는 토지와 빵과 평화를 가져다줄 의사와 능력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페트로그라드(독일과의 전쟁 이후 독일식 표기인 ‘페테르스부르크’ 가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의 주둔군이 짜르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압제자 니콜라스2세는 왕좌에서 끌려내 려왔다. 이른바 2월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케렌스키를 수상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민중의 요구를 거부하고 ‘전쟁 계속’을 선언했다.

 

소비에트라는 권력기관을 스스로 만들어낸 노동자•농민•병사들은 마침내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접수했다. 볼세비키당의 지도자 레닌은 이로써 전 러시아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10월혁명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전쟁 그 자체에 반작용을 미쳤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당내 지도자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은 1918년 3월 3일, 브레스토一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의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일으켜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는 한 러시아의 사회주의정권은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다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러시아에 일국(一國)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이를 위해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으로 한숨 돌린 독일은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집결시킨 다음 운명을 건 대공세를 펼쳤지만 오히려 ‘솜므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1918년 9월 27일,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전투’에서 연합국에 대패하여 휴전을 맺자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치 독일군이 숭승장 구하고 있으며 승리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국민을 속여온 독일의 최고 군사령부도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독일제국”이라는 광적인 야망은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 대신 “이제 아군에게 예비 병력은 없다. 한시라도 빨리 강화를 맺어야 한다”,“오로지 총으로 자살하는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는 탄식과 절망만이 독일군을 사로잡았다.

 

독일에 혁명이 찾아들 시간은  임박했던 것이다. 1918년 10월 28일, 키일 군항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의 예를 본받아 각지에서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신속하게 조직되었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황제인 빌헬름2세를 퇴위시키고 ‘독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소 국가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의 보존”을 약속한 미국 대통령 윌슨의 소위 ‘민족자결주의’는 수억의 약소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패전국의 식민지와 종속국에만 적용될 뿐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저항한 유럽의 소수민족들은 체코 슬로바키아<체코언), 유고슬라비OK세르비아의 남슬라브인),폴란드 등의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겠다던 약속을 배반했다.

 

아리비아인들은 터키를 물리치고 여러 왕자들이 군웅할거 하여 요르단, 시리아 등의 나라를 세웠지만 이번에는 영국과 미국의 정치적 간섭 아래 편입되었다. 조선의 3.1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5.4운동을 위시해서 중국 민중이 반일 투쟁을 전개했지만, 구미 열강과 일본은 대륙에 대한 이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추구하는데 여전히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세계 질서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지만 나머지 세계 - 아시아,아프리카, 중남미의 수억 민중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했다. 그리고 식민지•종속국의 재분배와 영토 확장을 둘러싼 강대국 사이의 암투는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 후, 그 암투는 공공연한 전쟁으로,제1차 세계대전을 훨씬 능가하는 대폭발을 가져온다. 이 두 세계대전 사이의 20년은 평화시대가 아니라 대폭발을 예비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사라예보사건’의 주인공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폐결핵 환자였던 19세의 젊은 열혈 민족주의자 프린시프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할 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것은 오직 세르비아인의 해방뿐이었다. 그는 재판을 받았으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모면했다. 그러나 자신이 불지른 전쟁의 종말을 보지도 못한 채 지병인 폐결핵으로 1918년 봄 옥사하였다.

그렇다면 ‘사라예보사건’이 과연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인가?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차를 쏘지 않았다면 그 참혹한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진짜 원인은 ‘사라예보사건’이 아니라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영국, 프랑스 등 가장 먼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킨 나라들을 비롯하여 뒤늦게 산업화에 박차를 가한 미국,독일, 일본 등 후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유경쟁 자본주의 단계를 넘어 독점자본주의체제를 확립하였다. 극소수 대자본가의 손에 방대한 양의 자본을 집적•집중시킨 독점자본주의체제는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넓은 시장과 값싼 원료를 대량으로 조달할 원료공급지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집적이란 자본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말하며 집중이란 그 자본이 소수의 손에 장악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기계화 된 대규모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상품을 소비하고 거기에 필요한 원료를 조달하기에 국내의 시장은 너무 작고 국토는 너무 좁았다. 그러나 생산을 중단하는 것은 자본가에게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달리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달려야 하는 것처럼 개별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이윤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넓은 시장과 값싼 원료를 찾아 세계의 가장 낙후한 지역조차 빠뜨리지 않고 손을 뻗 쳤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다 그런 것이 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정부는 그러한 “사업의 자유와 안전”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다른 나라의 자본가들이 손대지 못하게 아예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전 세계는 한조각도 남김없이 자본주의 열강,즉 제국주의 나라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은 인도, 이집트,수단,홍콩,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남아프리카 등을, 프랑스는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반도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일대를,독일은 남서 및 동부 아프리카를,벨기에는 콩고 등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일본은 조선을,미국은 필리 핀과 하와이, 중남미를 배타적으로 지배했다.

 

제정러시아는 뒤늦게 이 대열에 뛰어들어 조선을 노리다가 일본에게 패해 물러섰으나 극동과 발칸반도의 얼지 않는 항구를 손에 넣기 위해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종이 호랑이’ 중국은 이들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반식민지 종속국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처럼 세계를 완전히 분할 점령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호시탐탐 인접 약소국가의 영토를 빼앗거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면서 군사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하거나 동맹을 체결하여 팽팽하게 맞섰다. 1914년의 국제정세는 바로 이와 같은 일촉즉발의 전쟁 전야였던 것이다.

사라예보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시기에,대부분의 제국주의 열강이 얽혀 있는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세계대전의 도화선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아니었다 해도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6월 28일이 아닌 다른 날 세르비아의 청년 프린시프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다른 사람이 총을 쏘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또한 그가 죽지 않고 다치기만 했다 할지라도, 설혹 최초의 교전 당사국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닌 다른 나라들이었다 할지라도,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일대결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는 겉으로 보기에 고대 로마제국이나 주변 약소국을 정복한 중국의 고대국가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본질 면에서는 서로 전혀 다르다. 고대 대제국의 지배자들이 자기가 믿는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혹은 정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 지배한데 비해서 현대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식민지에서 높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주의체 제의 속성이다.

 

그리고 대자본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가 이것을 보호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사라예보사건’은 서로 투쟁하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전쟁의 필연성이 현실화하는 계기였을 뿐이다. 이처럼 ‘사라예보사건’은 역사에 있어서 필연과 우연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세계적 규모의 제국주의 전쟁은 현대 문명이 불러들인 가장 혐오스러운 야만, 즉 현대 전쟁의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20세기의 인류 역사를 음울한 잿빛으로 뒤덮어버렸다.

 

그 전쟁은 “인간을 말살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장"’이라 불러 마땅한 것으로서, 전 세계 수백 만의 민중이 “조국 수호” “위대한 조국의 영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마약에 도취된 채 싸움터로 내몰려 마치 “전쟁기계의 부품처럼” 말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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